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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미안
며칠 전부터 붙잡고 있던 데미안을 오늘에서야 다 읽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문학적 감명. 지금의 문학에서는 사라져버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열정이 헤세의 작품 속에는 아직 살아 있었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처럼 나 역시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나는 데미안과 같은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헤밀이었다. 지금은 비록 연락이 잘 안 되고 있지만, 아직 남은 긴 인생의 기간 중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인생을 크게 변화시킨 것이 헤밀이었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인생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헤밀이 아니고 나였다. 삶이 어떠한 형태로 변화하든지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늘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나는 그것을 새삼 깨달았다. 모든 깨달음을 주는 순간들, 그리고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은 나의 성장과 함께 한다는 것을. 결국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정체되어 있을 때는 결국 똑같이 정체되어 있는 사람과 정체되어 있는 세계만을 맞닥뜨린다. 허나 내가 한 세계로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할 때, 다른 세계와 다른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요즘 너무 게을러져 있고, 무기력해져 있고, 외로워 하고 있다. 나는 세계가 나를 지치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세계를 지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데미안의 끝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그것을 살아보려고만 했지, 살고 있지는 않은 것이었다.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더 이상 세계를 지치게 해서는 안되겠다. 이제 그만 알에서 깨어 나야지.
2004. 6. 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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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의 뱀발 : 헤세의 <데미안>에 대한 좀 더 긴 독후감은 저의 소설 '소희'로 대신합니다.
(그동안 비공개로 해두었는데 잠시만 다시 공개합니다. 예고 없이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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