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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마니 (2015)

When Marnie Was There 
8
감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출연
타카츠키 사라, 아리무라 카스미, 마츠시마 나나코, 쿠로키 히토미, 테라지마 스스무
정보
애니메이션, 판타지, 드라마 | 일본 | 103 분 | 2015-03-19
글쓴이 평점  




떠올리리라 언젠가를 언젠가는



폭풍의 영향권에 접어 들었습니다. 여름 장마철이 지나면 뉴스에서 이런 일기예보를 듣게 된다. 만약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나는 아직 '마니의 영향권' 속에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극장용 만화영화 <추억의 마니> 이야기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바람이 아직 차가울 때 보았던 마니의 금발과 스러질 듯 반짝이는 별빛 같던 왈츠 음악이 떠오른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재능이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에게 계승되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브리의 감성은 <마루 밑 아리에티>를 연출했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에게서 더 찾을 수 있었다. 전작에 대한 믿음 덕분인지, 웹 속에 흘러다니는 낱개의 컷 때문인지 <추억의 마니>에 대한 내 기대는 컸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영화를 보기 시작했었다. 소년 같은 더벅머리를 한 12살 소녀 안나가 등장했을 때는 다정한 소년과 둘이 예쁜 첫 마음을 주고 받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오래된 나의 '소나기'성애증 탓.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추억의 마니>는 두 소녀의, 혹은 한 시절 소녀였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몸이 아픈 안나와 아름다운 금발의 소녀 마니가 사는 성 사이에는 바다가 있다. 달이 차고 이울 때마다 마니에게로 가는 길은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마니는 안나가 사는 세계로 자꾸만 건너오고, 안나는 마니에게로 자꾸만 가고 싶다. 둘의 마음 속에는 '그리움'이 있다. 바다는 매일매일 두 사람의 그리움으로 차오르고 넘실거린다. 


'추억'이란 것은 우리 마음 속에 담긴 마니 혹은 안나다. 추억은 우리가 지금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과거에 있지만 꼭 미래에 있는 것만 같다. 아주 먼 과거의 것일 수록 더욱 더 아주 먼 미래의 것처럼 여겨져서 더욱 갈망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참으로 미래에 있는 것, 아직 내가 가져보지 못한 미지의 것이라면 '그리움'이란 말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것은 욕망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 것들은 너무도 실체가 뚜렷하다. 자국뿐만 아니라 그 무게도 당장 몇 그램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다. 그런 것이 지금 우리에게 없다니. 분명 나의 것이었는데, 이제는 없다니. 우리는 그 마음을 상실감이라고 부르지만, 뒤집어 놓으면 그 마음은 또 하나의 강렬한 소유욕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거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허나 아시다시피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사는 차원의 우주에서는 시간여행자가 될 수 없다. 이 비극이 '추억'의 자리를 만든다. 


우리는 추억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기에, 추억을 우리의 자리로 불러들인다. 우리는 추억에게 말을 걸 수 없기에, 다만 추억의 말을 듣는다. 추억의 음악에 마음을 잃는다. 아주 멀리 있는 추억은 아주 멀리 있는 미래처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추억이라도 추억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그 추억의 작은 조각들을 불러들이며 살아간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어릴 적에 들었던 자장가는 귓가에 선명하다. 높고 쓸쓸한 어머니의 목소리. 노래를 통해 서글픔을 누르고 아이의 가슴을 토닥이며 희망을 찾아보려는 그 마음이 내 추억의 자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어쩌면 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은 지금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추억이 아닐까. 우리가 태어났을 때 기뻐했던 사람들의 마음, 작은 손짓과 표정에도 온 신경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해 촛불 같은 생명체의 삶을 지켜줬던 누군가의 손길이 지금의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가장 멀리 있는 그 과거를 다시 소유하고 싶어 사람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그리워 우리는 사랑을 한다. 


누구에게나 '마니'가 있을까. 마니처럼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아이가 추억의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을까. 나는 당신이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분명 당신 속 어딘가에 '마니'도 살고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당신의 '마니'가 계속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속삭이고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다만 우리가 그 희미한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할 뿐. 돈이 없고, 꿈을 잃고, 병이 들고, 사랑이 떠나 지금 당장 눈앞이 달이 없는 밤처럼 캄캄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살자. 그러면 결국 달은 다시 뜰 것이다. 그리고 떠올리리라 언젠가를 언젠가는. 당신의 마니를, 추억의 마니를 만나리라. 그 다음엔 왈츠를 출 것이다. 아니, 트위스트나 고고, 테크노여도 상관은 없겠지. 


2015. 6. 1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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