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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조르주 페렉 - 사물들 / 나의 21세기

멀고느린구름 2015. 5. 9. 09:22



사물들

저자
조르주 페렉 지음
출판사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5-03-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탁월한 언어 미학과 혁신적인 소설 기법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나의 21세기

* 이 글은 <사물들>의 표현 방식을 흉내내서 써본 저의 대학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신들이 부자일 줄 안다고 믿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바라보고, 웃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요령과 그에 필요한 신중함도 가졌을 것이다. 자신의 부를 잊고 과시하지 않을 줄도 알았을 것이다. 으스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풍요로움을 호흡했을 것이다. 그들의 즐거움은 강렬했을 것이다. 걷기를 좋아하고, 빈둥거리고, 고르며 음미하기를 즐겼을 것이다. 삶을 누렸을 것이다. 삶은 하나의 예술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상황은 쉽지 않았다. 가난하지만 않을 뿐 부를 갈망하는 가진 것 없는 커플에게 이보다 더 곤란한 상황은 없을 듯했다. 그들은 수준에 맞는 정도로만 갖고 있었다."


- <사물들> 22쪽 중


1980년대에 지어진 1층 단독주택의 낮은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두 사람 정도가 서 있을 수준의 조그만 마당이 나온다. 그 마당을 오른 편에는 창고로 써야할 법한 시멘트로 대충 지어진 네모난 4평짜리 별채가 있다. 정면에는 하나의 큰 방과 세 개의 작은방이 있는 본채가 있다. 신발을 벗고 본채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큰 방보다 큰 거실이 나오고 그 거실을 가로질러 정면에 보이는 문을 열면 그의 방이다. 그의 방문을 열면 5평 정도의 공간이 주어진다. 네 사람의 성인이 질서정연하게 누우면 잠을 이루는데 약간의 불편만 초래할 정도의 넓이다. 문과 마주하고 있는 벽에는 A3 용지 정도의 창이 있다. 너머에는 50센티미터 즈음의 간격을 두고 거대한 교회의 벽이 있어 햇빛을 효과적으로 가린다. 창 옆에는 산업화 시대와 함께 태어났을 법한 낡은 싱크대가 있다. 싱크대는 산업화 시대의 냄새를 맹렬하게 내뿜는다. 싱크대 아래에는 밤새도록 바퀴벌레의 날개짓 소리가 들린다. 


방의 왼쪽 벽에는 이전에 살던 사람의 흡연 습관 탓인지 조금 검게 그을린 흔적이 있다. 그는 싱크대와 왼쪽 벽이 직각을 이루는 곳에 천 원 샵에서 만 원을 주고 얻어온 붉은 색 밥통을 놓아둔다. 그 아래가 침구를 개어 놓는 자리다. 솜이 아닌 스폰지가 들어 있는 빗살 무늬 커버의 요는 인근 시장에서 5천원에 사온 것이다. 언제 빨았는지 연대 추정이 어려운 이불 역시 같은 곳에서 8천원 정도를 주고 얻어왔다. 하늘색 바탕에 동그란 땡땡이 무늬가 그려진 이불이었다. 그러나 그 디자인이 반드시 그의 취향을 대변해준다고는 할 수 없었다. 동네 시장이 구비하고 있는 침구의 디자인은 의외로 다양했지만, 의외로 그 누구의 취향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베개는 대학교 후문 거리의 선물 가게 '임프'에서 2만원을 들여 사온 것으로 고양이의 얼굴을 사물화한 것이었다. 이것만은 낮은 수준에서나마 그를 표현하고 있다. 


오른 편 벽으로는 그가 가진 재산에서 값어치로는 80% 이상을 차지하는 책장들이 있다. 폐목재를 모아 만든 엠디에프 소재의 책장으로 무술 유단자의 격파 용으로 유용할 것 같은 느낌이다. 형편이 되는 대로 사들였기 때문에 3단, 2단, 5단 등 다양하다. 그는 이 조그만 혼혈 나무들이 침구 세트의 가격보다 더 비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주문용 전면 책장이나, 스프러스 원목 책장의 가격을 들여다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격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일찍 깨달았을 것이다. - 부모의 원조를 전혀 받지 못하는 그가 한 달에 아르바이트를 통해 얻는 수입은 30만원이었다. 방세로 22만원을 내고 나면 8만원이 남았으므로, 그는 8만원 한도 내에서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200여권 가량 꽂혀 있다. 책의 원가를 따지자면 200만원 상당이 되어, 그가 약 9개월 동안 낼 수 있는 방세에 달했다. 책의 30%는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도서관에서 폐기 처분되던 것을 빼돌린 것이다. 50%는 청계천의 중고서점에서 한 권에 500원 정도를 주고 얻어온 폐품들이다. 나머지 20%만이 정상적인 서점에서 구입해 온 것이다. 그는 책을 좋아했으나 살 수 없었으므로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대형서점으로 나들이를 다녔다. 헌책과 폐기 처분의 위기를 벗어난 책들로 주로 구성된 그의 책장은 지구촌 세균들의 집합소일지도 몰랐으나 그는 세균 감염으로 요절하지는 않았다. 


책장의 아래에는 '세느강'이라 불리는 동네의 천변에서 주워온 나뭇가지형 철제 옷걸이가 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칠이 벗겨졌지만 아마도 그의 방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일 것이다. 옷걸이에는 다섯 벌 내외의 옷이 걸려 있고, 대체로 상표를 거론하기도 어려운 1만원이 넘지 않는 옷들이다. 철제 옷걸이 옆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3단 서랍장이 있다. 서랍과 장의 아귀가 잘 맞지 않았고, 내구력이 약해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진 곳을 테이프로 대응해놓았다. 그외 그의 방에는 곧 팔아서 다음 달 월세를 만드는 데 보탤 예정인 24개월 할부로 산 휴대용 게임기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독지가로부터 얻은 다구와 보이차, 1년에 한 두개를 구입할 수 있는 음악 씨디 몇 개가 있다. 


침구 세트 3만원, 책장 3개 10만원, 책 20만원, 플라스틱 서랍장 2만 5천원, 음악 씨디 10만원, 옷 13만원. 도합 58만 5천원. 이것이 그가 사는 세계의 규모였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는 58만 5천원의 범주를 넘어서는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백 만원의 세계, 천 만원의 세계, 일 억원의 세계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보통의 서민들은 적어도 백만 원의 세계를 살았고, 중산층은 천만 원의 세계를, 부유층은 일억 원의 세계를 살았다. 


그는 그가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원대한 꿈을 꾸었다. 금전적인 것과는 되도록 연관이 없는, 세계의 평화나 진보적 혁명, 예술적 가치, 자연의 아름다움 등을 추구했다. 그는 돈이 들지 않는 명상과 산책을 즐겼고, 학원에 등록하는 대신 아무 대학교의 강의실이나 들어가서 청강을 했다. 1년을 휴학하며 돈을 벌고, 1년 동안 대학교를 다니면 수 백만원의 빚이 다시 생겨났다. 불어난 빚만큼 더 일을 하며 1년을 휴학한 뒤, 다시 1년 학교를 다니면 이전보다 더 많은 빚이 생겨났다. 무한정하게 카드를 제공했던 정부는 1년만에 모든 카드를 수거해 갔고, 그에게 남은 인생의 히든 카드마저 사라졌다. 그는 오로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만 살아갔다. 그는 물론 어릴 때 자신이 살아갈 21세기의 모습을 이렇게 상상하지는 못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페렉이 그린 1960년대 프랑스의 희망없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그토록 반짝여 보일 줄은 몰랐다. 


그는 58만 5천원의 방에 누워 먼지가 끼고 녹슨 형광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나의 21세기로구나. 



2015. 5.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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