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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회 2집과 1997년의 골든에이지
우주형사 위제트를 닮았던 친구가 눈을 지그시 감고 황홀경에 빠져 있다. 그는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 있고, 때는 초여름이다. 간간이 매미 소리가 들려 왔고, 다대고등학교 1학년 교실의 창 저편으로 펼쳐진 바다는 모종의 꿈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햇발이 흔들리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엇이 그를 저 너머의 세계로 데려가고 있을까 궁금해했다. 이윽고 그는 눈을 떴다. 나를 바라본다. 자신을 관찰하고 있던 나를 알아채고, 귀에 걸었던 이어폰을 빼서 나에게 건네며 말한다.
"들어볼래? 쥑인다."
나는 장미기사단의 가입 원서를 받아드는 것처럼 이어폰을 건네받아 귀에 건다. 위제트는 자신만만하게 리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널... 만나기 위해 길을 걸었지... 아무도 모르게...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나는 바로 얼마 전 위제트와 꼭 같은 표정을 짓는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완전히 바로 전의 위제트와 동화되어 있다고. 마치 시간의 함정에 빠진 시간여행자처럼 우리는 같은 장면을 반복하고 있다고. '전람회'는 내게 그렇게 찾아왔다.
몇 년 전, 영화 <건축학개론>이 국민 첫사랑 수지에 힘입어 대성공을 거두면서 김동률의 데뷔 그룹인 전람회와 그 1집에 수록된 '기억의 습작'이 재조명되는 일이 있었다. 아마도 순서를 제대로 밟은 모범적인 팬들이라면 '기억의 습작' 속에 훨씬 더 많은 추억을 눌러담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기억의 습작'은 후순위다.
그해 초여름 처음으로 내게 강한 인상을 심었던 곡은 전람회 2집에 수록된 '마중가던 길'이었다. 당시 워크맨도 씨디플레이어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나는 위제트의 카세트 테이프를 빌려서 이 노래의 가사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불렀다. 학교로 향하는 길 위에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바다에서. 숲 속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점심의 문예부실 안에서. 가히 이 노래는 내게 1997년의 노래가 되었다.
1997년은 나의 골든에이지였다. 중학시절 전따를 당했던 나는 홀홀단신으로 아무 연고가 없는 다대포 지역에 처음 생긴 남녀공학에 입학 지망을 했고, 아주 앞선 순위로 입학이 허락되었다. 입학식장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의 99%는 자신이 전혀 이런 허름한 학교에 올 사람이 아닌데, 우주의 불온한 횡포로 인해 이런 결과를 맞게 되었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기뻤다. 새로운 행성에 도착한 기분이 오히려 상쾌했다. 물론, 그해에 그렇게까지 엄청난 일들이 밀려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지만.
1997년을 나의 골든에이지로 만든 몇 가지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당시로는 부산에서 거의 유일했던 인문계 남녀공학, 게다가 여남합반! 더해서 내 첫 짝궁은 실로 엄청난 미인이었다. 아마도 내가 훗날 좋아하게될 이성의 얼굴의 많은 요소를 그 첫 짝궁이 제공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둘째, 고등학생 가수 이지훈이 데뷔하며 '왜 하늘은'이라는 곡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요즘으로 치면 거의 '엑소'급의 인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지훈이 나와 똑같이 생겼었다. 지금 우리는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걸으며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정말 도플갱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았었다. 나는 KTX의 지붕 위에 올라탄 것처럼 가파르게 교내에서 주가가 오르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말이다.
셋째,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나는 '문예부'와 '수예부'의 차이를 감별할 수 있게 되었고, 처음으로 문예부에 입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 그곳이 공교롭게도 여인들의 왕국이었다. 13명의 입부생 중에 남자는 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 이 세 가지 정도만 하더라도 골든에이지는 완벽하게 성립한다. 천운이 함께 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남자 아이의 인생에서 이 정도의 황금조건을 갖춘 인생을 경험해본 이가 얼마나 될까.
이후의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소설 속에서 표현하기로 기약하고 생략한다. 다만,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내가 1997년 한 해에만 각기 다른 이에게 30통이 넘는 러브레터를 받았다는 점이다. 전체 여학생이 230명 정도였으니, 이 수치는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의의가 있으리라.(^^;)
전람회 2집에는 나의 이 골든에이지가 담겨 있다. '고해소에서'에는 말할 수 없었던 개인적 번민이, '이방인'에는 나만이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가, '재즈바에서'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여유롭고 싶었던 그 시절의 소망이, '유서'에는 생에 대한 흔들림이, '마중가던 길'에는 골든에이지의 입구와 그 서글픈 결말이, '새'에는 한 없이 날아오르던 풋사랑의 미열이, '블루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오지 않던 크리스마스의 바다가, '취중진담'에는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의 맹세가, '10년의 약속'에는 사라지지 않을 그 시절의 공기가 담겨 있다.
어떤 음반에는 음악을 넘어선 것들이 머문다. 아무리 고명한 음악평론가들이 모여서 한국의 100대 명반을 선정하고, 그 속에 '전람회 2집'을 넣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 없다. 한 음반에 혼을 불어넣는 것은 평론가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 음악과 한 시절을 살아낸 이들의 추억이다. 전람회 2집은 내 1997년의 1대 명반이었다. 이것은 어떤 대가가 오더라도 결코 움직여 놓을 수 없다.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오늘도 빗소리 앞에 전람회 2집을 내놓는다. 저 멀리서 1997년의 골든에이지가 조용한 파도로 밀려오고 있다.
2015. 7.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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