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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발걸음 소리가 자분자분 들려오는 듯 하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향기나는 햇발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가로운 보사노바 음악에 맞춰 게으른 마음을 다독이다 아, 그 때 생각이 났다. 

사랑하던 이에게 차마 말 못하고 감춰둔 마음을 어느 맑은 강물에 흘려보내고 싶었다. 나는 여름의 끝자락에 여행을 떠났다. 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버스를 타고, 낯 선 풍경들을 바라보다 이름 모를 정거장에 내렸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의 삶을 혼자 시작해야 했던 그 시절. 내게 삶과 세상은 커다란 무지(無知)였다. 집을 떠나와 주소도 잃고, 온통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 거리들. 무명(無名)의 도시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은 하늘과 바람, 별과 구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외롭고 무서웠다. 

내가 내린 곳은 경상남도 천성산의 어느 한 자락. 내원사라는 사찰이 있는 곳이었다. 우연히도 그곳은 2년 전 들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소년이었던 나는 그 당시 문학공모전 일곱 곳에서 연거푸 낙방하고, 삶의 운전대를 놓아버리고 있었다. 그때 훌쩍 찾아왔던 곳이 바로 이 내원사. 입구를 지나면 내원사 본원으로 향하는 오른편의 오르막길과 개천이 이어지는 왼편의 샛길이 나온다. 나는 단순한 호기심에 왼편의 샛길로 향했었다. 에메랄드 빛 개천을 건너, 구름 속 같은 비오는 숲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고 얼마간 가면 외딴 암자가 하나 나온다. 그 암자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 청아한 모습은 한 장의 사진처럼 기억한다. 아스라한 추억의 고향 어느 골목 귀퉁이에 컹컹 짖고 있을 법한 커다란 개가 있고, 관음보살님 같은 포근한 미소로 반겨주는 비구니 스님이 계신 곳. 

나는 은은한 인연의 향기를 맡으며 다시 그때의 암자로 향했다. 암자는 2년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크게 숨을 들이쉬며 올려다 본 하늘이 까무룩 높아 보였다. 암자에 들어섰다. 비구니 스님께서 변함없는 다정함으로 맞아주셨다. 어머니가 없던 내게는 어머니의 품을 연상시키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불당에 불공을 드리고 나니, 스님께서 시장하겠다 하시며 공양밥을 먹으라 하셨다. 비구니 스님께서는 손수 밥을 퍼담아 주셨다. 더금더금 쌓이는 흰 쌀밥을 보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공양을 마치고 나와 하늘을 보았다. 오련한 단풍빛깔의 하늘. 스님께서 참 곱지? 하셨다. 스님의 마음도 하늘빛깔처럼 참 고울테지. 어머니의 사랑을 잃고, 연인의 사랑도 잃고, 스스로의 사랑도 잃었던 나. 이름 없는 세상에 이름 없는 나.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는 이 없었다. 나는 자유로왔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망망한 하늘을 떠도는 멀고 느린 구름 같았다.

비록 갈 곳은 없지만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했다. 스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며 물었다. 

'스님께서는 돌아갈 곳이 있나요?'
'있지요.'
'어딘가요, 그 곳이?'

스님께서는 심장에 손을 차분히 가져가시며 말씀하셨다.

'여깁니다. 저는 사랑의 집을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스님.'
'사랑이란 다가가서 맞이하는 겁니다.'

다시 또 외로운 가을이 온다. 사람들은 외투를 껴입고, 창문들은 굳게 닫히겠지.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다가갈 줄만 알고 기다릴 줄은 모른다. 또 우리들 중에 누군가는 하염없이 기다릴 줄만 알지 문을 열고 나갈 줄은 모른다. 창문을 잠그고 다가가는 이, 창문을 잠그지 않고 기다리는 이. 결국 모두의 창문은 닫혀 있다. 올 가을, 내 가슴 속 사랑의 집에는 창문을 달지 않기로 한다. 뻥 뚫린 벽으로 정다운 혹은 슬픈 사연들이 쉬이 들어오도록. 한가로운 보사노바 음악이 끝난다. 게으른 마음을 이끌고 서랍 속에 오래 묵혀 두었던 긴 팔 셔츠를 꺼내 입는다.

그래, 이제 가을을 맞이하러 가야겠다. 사랑하는 너를 기다리러 가야겠다.
 
2003. 10. 2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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