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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언젠가 기린을 만난다면

멀고느린구름 2015. 5. 27. 09:19



언젠가 기린을 만난다면 



"저는 동물 중에서 기린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다음은 펭귄이나 코끼리입니다."


최근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기린을 만난다면 무얼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마치 지금 당장 허난설헌과 만난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글쎄, 동경했던 대상이긴 했지만 직접 대면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직접 기린을 만난다면 물론 그 장소는 높다란 쇠창살이 둘러져 있는 냄새 나는 동물원은 아닐 것이다. 상상을 해본다면 세렝게티와 같은 대평원에 깨끗한 화이트 식탁보가 덮인 식탁을 사이에 두고 기린과 마주앉아 있는 모습이 이상적이겠다. 지평선으로는 붉은 노을이 지고 - 이문세의 '붉은 노을'은 BGM으로 깔리지 않아도 된다. - 기린과 나는 시원한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며 서로의 삶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기린은 말한다. 


"요즘 같이 날이 더워서는 풀들도 메말라버리고 말아요.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대체 뭘 먹고 살라는 건지."


나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노을은 무척 아름답지 않나요."

"구름님은 로맨티스트시군요."

"기린님에 비하겠습니까."

"제가 로맨티스트인가요?"

"기린님의 기다란 목과 슬픈 눈동자, 초승달 같은 속눈썹은 그런 인상을 주거든요."

"그렇군요."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멈춘다. 우리는 해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본다. 


"완전히 가라앉았군요."


기린의 말. 


"엄밀히 말하면 그저 다른 세계로 옮겨간 것 뿐이죠. 지구의 반대편으로."


나의 말. 


"그건 마치 사랑과도 비슷하군요. 이런 질문이 좀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구름님은 사랑을 해본 일이 있나요?"

"글쎄요."

"태양에 대해 아는 것만큼 사랑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런 말이 되어버렸군요."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물어본다고 해서 또 제가 그걸 잘 안다는 것은 아니에요 물론."

"기린님을 만난다면 무얼 하겠느냐고 물어봤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것 참 흥미로운 질문이었군요. 해서 뭐라고 답하셨었나요."

"아무런 대답도 못했었지요."

"어째서요?"

"내가 내 인생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던 것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되어버렸거든요."


기린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본다. 이윽고 시선을 밤하늘의 별들 사이로 옮긴다. 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기린은 별들의 사이를 바라본다. 


"구름님,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몇 광년인지 아시나요?"

"지구에서 명왕성까지의 거리라면 알고 있어요. 가장 가까울 때는 42억 5000만 킬로미터, 가장 멀 때는 75억 5000만 킬로미터죠."

"별이란 것도 우리들처럼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하는 것이군요."

"그런 셈이네요. 타원형의 궤도를 도니까요."

"그럼, 우리들 마음의 궤도도 타원형인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겠지요."

"별과 별이 만나면 어떻게 되나요?"

"폭발하죠. 그리고 별이 폭발한 자리에는 시간과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구멍이 생겨나겠죠."

"기린과 사람이 만나면요?"

"이렇게 파인애플주스를 마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서쪽 하늘을 향해 사선을 그리며 별똥별이 졌다. 맑은 기린의 눈동자가 더 맑게 빛났다. 별이 기린의 눈동자로 떨어져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혹여 내 눈동자로도 별이 하나쯤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 한참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초원의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달빛에 젖은 기린의 털이 황금물결을 그린다. 나는 파인애플주스를 한 모금 삼키며 기린의 뿔을 올려다본다. 


"기린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 거죠."

"별들의 소리를 듣는 일종의 안테나 같은 거랍니다."

"지금 별이 뭐라고 하나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노래죠?"

"자장가 같은 겁니다. 수 십억 년 전부터 불러오던 노래죠. 들려드릴까요?"

"기꺼이."


기린은 별의 자장가를 옮겨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기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다란 목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기린의 노랫소리는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깊은 신뢰와 희망, 긍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왈칵 울음이 쏟아질 뻔한 고비를 수차례 넘겨야 했다. 별의 자장가가, 기린의 노래가 끝났다. 나는 다시 듣고 싶다고 아이처럼 졸랐다. 기린은 마지못해 다시 노래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멈추지 않는 수 십억 년 전의 자장가를 들으며 생각했다. 기린을 좋아해서 참 다행이야. 라고. 



언젠가 기린을 만난다면 위와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2014. 6. 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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