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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는 꿈

멀고느린구름 2015. 6. 28. 23:42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는 꿈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 중의 하나다. 물론, 좋지 않은 연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없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또 구태여 '좋은 연인'을 '꿈'의 목록에까지 올려놓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좋은 연인이 되는 것이 내 꿈의 목록에 올라가 있다는 말은, 내가 현재로서는 상대에게 전혀 좋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야할 정도로 헌저하게. 객관적으로 공표하자면 나는 현저하게 연인으로서 좋은 상대가 아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에 상경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훗날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소년이었다. 꼰대나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적대적인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외에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생각이 깊고, 남자애 치고 말씨가 상냥한... 어떻게 보면 흠잡을 곳 없는 문학소년이었다. 물론,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의 호의적인 시선 속에서 나를 그와 같은 썩 준수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청소년 시절은 내가 주위로부터 받았던 평가들과 전혀 상반되는 환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얘기는 하도 많이 했으니 상술하지 않겠다. 아무튼 보통이라면 나는 훨씬 더 거칠고, 제멋대로이면, 드러나게 비뚤어진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내가 된 것은 누구에게나 놀라운 일이었다.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내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사귐, 연애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마디로 나는 허깨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다듬어놓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성격, 배려심, 예의, 친절함, 사려깊음, 성실함 이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도 연인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했다. 연인들 앞에서 나는 예민함, 냉정함, 무심함, 이기적, 무책임함, 변덕스러움 이라는 키워드의 대명사가 됐다. 


솔직히 말하고 싶다.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도 나는 내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문제라는 생각을 온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나는 누구에게나 훌륭한 청년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인데, 하필 여자친구들만 나를 잘 대하지를 못하니... 이건 상대방의 문제 아닌가?"라는 생각을 늘 강하게 마음에 품었었다. 20대 중반 이후 명상 수행을 하고, 여러 영적인 스승들에게 조언을 들으며 생각의 방향을 나 자신에게로 바꾼 뒤에도 나는 온전히 내 문제를 내 것으로 끌어안지 못했었다. 오히려 수행을 시작한 뒤부터는 내 수행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새로운 핑계를 만들어내 문제를 파트너에게 떠넘기곤 했었다. 


최근 여러 페미니즘 이슈가 터지고, 데이트 폭력 문제 등이 대두되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는 여러 여성들의 글을 정독해서 읽으며 나는 조용히 나의 혐의점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됐다. 데이트 폭력이 비단 물리적인 폭력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폭력 또한 데이트 폭력의 중요한 한 구성 요소다. 그리고 돌이켜보건데 아마도 나는 이 정신적 폭력의 주요한 가해자였으리라 생각한다. 그로 인한 아픔을 겪었을 지난 연인들에게는 가능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사과를 드리고 싶다. 당시에 내가 어떤 식으로 책임을 전가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관계에서 일어났던 대다수의 정신적 공격은 나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음이 자명하다. 헌신에 대한 보답이 비난과 애정의 철회로 나타났을 때의 상처와 공허감은 어떤 사과로도 보상할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처지에서는 오직 몇 번이고 사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모쪼록 양해해주길 기대할 뿐이다. 


나는 명백한 데이트폭력의 가해자였다. 허나 한편, 여전히 내가 사회적 대인관계에서는 '아주 좋은 사람' 쪽에 가깝게 평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극심한 괴리는 나와 사귀었던 연인들에게 더욱 큰 심리적 허탈감과 배신감을 선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죄송한 일이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내가 20대 초반부터 지금껏 고민해오고 있는 내 인격적 고민의 모든 것이 이 질문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 아홉의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남자친구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미래를 상상했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열 아홉 때의 나와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인의 키워드는 이런 것이다. 다정하다. 배려심이 많다. 현명하다. 유머러스하다. 성실하다. 한결 같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거나, 차별을 하지 않는다. 이해심이 많다. 위로와 조언을 조화롭게 잘 해줄 수 있다. 멋에 대한 감각을 잘 유지한다. 노래를 잘 불러준다. 사소한 것일 수록 더욱 세심하게 챙겨준다. 등등등. 나는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이상적인 모습들을 가져다가 나의 이상적인 남친상으로 만들어놓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어떨까. 냉정하게 바라본 나는 이런 것 같다. 만약 상대방을 10시간 동안 만난다고 가정한다면, 그 중 5시간 정도는 정확하게 위의 모든 이상적인 연인상을 총망라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3시간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1시간은 뭔가 딴 생각에 빠져 있다. 1시간은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 비난하고 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곤 한다. 정말 아무 이유가 없고, 그저 내면에 가득찬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 폭발하듯 나를 휘감아버린다. 그런 순간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지나가지만, 연인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대체로 그냥 지나가지 않게 되고 만다. 그런 순간에는 연인의 아주 무의미한 행동과 말도 끌어당겨서 내 분노의 원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연인은 난데없이 내 냉혹한 태도와 말투 앞에 놓여야 한다. 한번 시작되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고, 나로서도 거의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런 모드에 빠진 나와 대화를 한다는 건 거의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과 똑같다. 나는 상대의 어떤 논리든지 화려한 언변으로 돌려세워서 상대를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킨다. 


* 이 점이 결정적으로 사회적 평가와  연인들의 평가를 극단적으로 나누는 부분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기묘하게도 사회적 관계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덕분에 사회적관계에서의 내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내게 애정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이런 분들에게는 꼭 연인관계가 되었을 경우의 내 정신 상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미리 얘기를 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체로 그 정도를 실감하지 못하고, 설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아,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정말 싫은 남자친구다. 


어쩌면 나를 좋은 연인으로서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저 5시간이 끝날 즈음 재빨리 일과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5시간이 지속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전체의 시간 중에 분량이 그 정도라는 뜻이다. 결국 오락가락하는 그 혼란스러운 틈 중에서 어느 때가 들어오고 빠져야할 순간인지를 캐치한다는 것은 가히 신기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상대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현재로선 '연인이 되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나는 내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상대는 계속 상처를 입는 일이 반복된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늘 '이별'뿐이었다. 그나마 내가 '진보'했다고 할 수 있는 건 이별의 사유가 상대가 아닌 나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나의 예민함을 중화시켜주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도 이제는 그만뒀다. 상대의 도움이 있어야 내가 예민해지는 순간을 넘어갈 수 있다는 자기 최면도 버렸다. 내 문제는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 혼자서 해결해내야 하는 과제임을 명확히 하기로 정했다. 지나치게 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상대 연인에 대한 관심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내 문제에 대해 집착하게 되는 것을 중화시킬 수도 있음을 알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서로에게 오고 가겠는가. 그러나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상대는 내게서 상처 받은 것들을 떠올리며 아파하는데, 나는 그네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아직까지 쓰라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도 더 미안해하고 몸을 낮추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네들의 상처가 온전히 아물 때까지 몇 번이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연인이 되고 싶다. 나의 아주 오래된 꿈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여전히 별로 많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마도 요즘 내가 하는 행동들을 어딘가에서 전해 듣는다면 구여친분들은 어이구 저놈이 아직도 저러고 사나 할 게 틀림없다.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일이다. 내가 누구와도 연인 관계가 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평화를 더하는 일임에 틀림 없을 텐데도... 나는 아직도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 하고 싶다. 아직도 좋은 연인이 되고 싶은 꿈을 버리지 못하겠다. 


두 사람이 있다. 


A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랑을 받고 자라, 사랑을 전하고 느끼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다. A는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할 때도 편안하고, 큰 문제가 없다. A는 특별히 더 좋은 연인이 되어야 한다는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A는 몇 번의 연애 끝에 적당한 사람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가끔은 싸우고, 가끔은 화해하는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 


B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사랑을 전하고 느끼는 일에 서툰 사람이다. B는 연애를 할 때마다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자신도 지독한 내상을 입는다. B는 연애를 하면 할 수록 연애가 두려워지고 사람을 기피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B는 꿈을 잃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A와 B는 출발점이 다르다. A가 사랑레벨 30포인트에서 시작한다면 B는 0포인트에서 시작한다. 30포인트에서 시작한 A는 20대-30대에 40포인트 정도에 도달하고 평생을 그 정도를 유지할 것이다. B는 20대~30대에 겨우 10포인트 정도에 이를 것이다. 40대가 되어야 겨우 평균 영역인 30포인트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B는 50대, 60대에도 40, 50, 60포인트로 계속 상승해가지 않을까. A와 B 사이에는 서로가 교차하는 크로스포인트가 있어서 그 시점을 지난 뒤 A와 B의 평가는 달라질 수도 있다. 물론, B가 자신을 꾸준히 성찰하며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나로 말하자면 (A로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B가 되고 싶다. 50대, 60대가 되어서도 한 배우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되고 싶다. 물론, 현재의 내 수준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꿈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미완인 내게도 사랑과 신뢰를 보내주고 계신 연인님께 늘 고마움을 느낀다. 사랑이란 것이 무엇일까. 그 질문의 답에 아직 우리는 가닿아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모쪼록 내 몫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감당하겠다. 그리고 반드시 이겨내겠다.


덧붙여서 나이 서른이 넘은 성인이 어린 시절의 상처를 운운하며 자신의 과오를 물타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서른이 넘었으면 이제 자신의 인생으로 평가 받아야 하며, 자신이 살아온 삶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 어린 시절의 상처는 상담가나 의사 앞에서나 할 말이다. 아직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더이상 세상이나 부모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일 뿐이다. 적어도 그런 각오를 가져야 한다. 



2015. 6.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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