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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문득, 길을 잃었다

멀고느린구름 2016. 1. 11. 00:51


문득, 길을 잃었다 

정말 '문득'이어서 어디서부터 내가 길을 잃은 채 걷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신해철이 갑자기 죽은 시점부터라거나, 

세월호가 침몰한 순간부터라거나, 

그도 아니면 박근헤 대통령 당선 발표가 나던 때부터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언제 어디에서 길을 잃기 시작한 것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더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살아가고 있고, 돈을 벌고, 갖고 싶은 물건들을 사모으고, 사람을 만나고 있다. 

단지 그것 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내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단지 그것 뿐인 인생이 되었다. 

나는 노를 잃었고, 내가 탄 뗏목은 강물 위를 단지 흘러가고 있다. 고 말하면 좀 더 선명한 해상도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점점 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간다.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아무 것도 보지 않으며,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곳도 가지 않는다. 

아무 것이라도 먹는 것은 그나마 참 다행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까. 

얼마나 더 라는 시간을 살면 나는 이제 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나일 뿐이라는 말이 멋있게 들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내가 아직 변화하고 성장할 것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단지 나일 뿐이다. 

이 말은 이제 어딘가 서글프게 들린다.


문득, 길을 잃었다.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갈림길에서 다른 길로 걸어가 봐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길을 잃었다. 

나는 나아질 수 있을까. 

점점 사그라드는 마음 속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저 막막하게 멍청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요즘이다. 


2016. 1. 1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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