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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터너 - Mortlake Terrace



딜리트

(Bye bye Memorial code-etc1)






한 달 전부터 계속 가슴이 아프다.

살아가다 보면 몸 어딘가가 갑자기 아플 때가 있다. 그것은 건강을 좀 신경 써달라는 몸의 SOS다. 구조요청을 받은 사람들은 병원으로 달려가곤 하는데, 병원에서 간혹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


'글쎄요. 몸에 아무런 이상은 없는데...'


건강검진표를 보니 나는 정말 양호한 인간이었다. 나는 병원을 나와 코리아시티의 거리를 걸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플라타너스 입사귀 몇이 죽어서 거리를 나뒹굴었다. 잎 하나가 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파삭. 하는 비명소리. 가슴이 또 아파왔다. 그러나 내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거리를 계속 떠돌았다. 코리아시티를 지나 챠이나시티까지 이어진 플라타너스 오솔길을 지나 또 한참을 걸어 잉글랜드시티까지 걸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혼자 커피를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잉글랜드시티의 대형 음반가게 '리버풀' 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새로운 비틀즈의 기념음반을 사기 위한 행렬. 비틀즈는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꼭 사람들의 기억처럼. 사람들의 기억이란 것도 그렇다. 이제는 다 잊은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들. 그래, 사람의 모든 기억은 다만 안개 뒤에 숨어 있을 뿐인 것 같았다. 


리버풀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아담한 순백색의 갤러리카페가 하나 있다. 새하얀 문을 열면 딸랑하며 종소리가 나고, 그 안에는 1851년에 죽은 윌리엄 터너의 음울한 풍경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렇게 죽음은 때로 삶의 공간 속에서 다시 살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저기를 가본적이 있었나?'


문득 든 생각. 나는 모퉁이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리버풀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늘 리버풀에서 음반을 사서는 곧바로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 저 모퉁이를 돌아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그곳에 순백색의 갤러리카페가 있으며, 그 안에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가 있다고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리버풀을 지나 저편에 있는 모퉁이를 바라봤다. 그곳으로부터 깨끗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몸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몸 속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깨어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슴을 움켜쥘 정도였다. 가슴이 아팠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진통제도 없고, 병명도 몰랐다. 플라시보 효과를 이용해 손으로 쓰다듬어 보려 해도 통증의 진원지가 굉장히 깊게 느껴졌다. 사실, 통증의 진원지가 내 몸 속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내 몸이 아닌 내 몸 보다 더 깊은 어디선가 통증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아픔이 좀 가셨다. 나는 모퉁이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 모퉁이를 돌아보면 정말 순백색의 갤러리카페가 있을까? 모퉁이를 돌았다. 카페는 없었다. 순백색의 갤러리카페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짙은 갈색의 커피하우스가 놓여 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행인들이 내 곁을 하나 둘 스쳐지났다. 어쩐지 하늘이 깊어 보였다. 햇살이 내 몸 깊은 곳까지 뻗어오고 있었다. 혹시 저 햇살은 내 가슴의 통증의 진원지까지 닿고 있을까. 빛이라면 거울을 제외한 모든 것을 투과하니까 아마도 햇살은 이미 그곳에 닿았을 것이다. 문득, 사람들의 잊혀진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은 태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저 빛이 우리 마음의 어두운 터널을 투과해 기억을 비춘다. 그러면 원하지 않게도 사람들은 살아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까지도. 


'이 사람은 세상을 왜 이렇게 암울하게 봤을까? 지구는 아름다웠다고들 하는데..'


윌리엄 터너의 Mortlake Terrace를 보며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 기억이 갑자기 머리 속에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머리가 고장 났나? 혹시,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니 머리에 이상이 있었던 건가. 나는 커피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웨이트리스의 경쾌한 목소리.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커피하우스의 벽면에는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들이 걸려 있었다. 


'저... 혹시 여기 하얀색이 아니었던가요?'

'네?'


웨이트리스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표정이었다. 


'혹시 리뉴얼 같은 걸 하지 않았어요?'

'저희 가게는 지구에서 이전해 온 이후로 계속 그대로였습니다만'

'네에...실례했습니다.'


가슴이 또 아프다. 커피하우스에서 나는 콜롬비아커피향이 자꾸만 가슴의 환부를 자극 했다. 나는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슴의 통증이 가라 앉았다. 좀 숨이 쉬어지는 느낌.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죠지...?'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왠지 가슴에 얼음조각이 꽂히는 것 같았다. 긴 갈빛 머리에 분홍빛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고는 앞에 서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오랜만에 만난 사이처럼 그녀가 물었다. 허나 표정에 반가움 보다는 당혹감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얼굴을 자세히 봐도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떠올리려 하면 할 수록 가슴에 박힌 얼음조각이 점점 더 깊이 파고 드는 듯 했다. 가슴을 살짝 움켜 쥐었다.


'누...구...시죠?'

'........'


어색한 침묵.


'죄송합니다...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네요.'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 번 정중히 숙이더니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나에게서 멀어졌다. 마치 그 걸음이 평범하게 느껴지도록 연출하는 것처럼. 그녀는 보통걸음으로 점점 작아져 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가에 잠깐 비췄던 물기를 보고 말았다. 그녀는 이내 모퉁이를 돌아 어느 골목으로 사라졌다. 저 모퉁이를 돌아 또 가면 어떤 곳이 나올까. 혹시 그곳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곳이 아닐까. 잠시 안개 저편에 숨어 있는, 내가 알고 있었던 어떤 공간이 아닐까. 


가슴이 점점 더 쓰라려 왔다. 이럴 경우 집에 가서 한 숨 푹 자는 게 최선책이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가도 잠을 자고, 또 계속 살아가다 보면 아픔은 어느 순간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기보다는 희석되어 간다. 아픔 앞에 점점 안개가 짙어져 가는 것 뿐이다. 아주 나중에는 내 아픔을 나도 볼 수 없는 날이 온다. 그 날에는 또다른 일로 인해 가슴이 이유없이 아플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아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안개 뒤에 아픔을 숨겨가며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처럼 이렇게 화창한 날이면, 태양이 빛을 환하게 퍼뜨리면 문득 가슴이 아파지곤 한다. 


한 달 전부터 계속 가슴이 아프다. 

어쩌면 한 달 전에 먹은 기억을 지우는 알약의 부작용인지도 모르겠다.





2004. 10. 2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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