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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물망초

멀고느린구름 2014. 2. 19. 09:12



물망초

 


프롤로그


푸르던 잎사귀들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고, 외로운 영혼들은 바람에 휩싸인 채 떨어져 내립니다. 하늘은 내가 거니는 땅과 별개인 것을 자랑하듯 저만치 아득히 떨어져, 멀게만 보입니다. 나의 가을날도 어느새 스물 한번 째... 난 온몸을 감싸 도는 싸늘한 옷깃을 여미며, 분분한 낙엽사이를 거닐고 있습니다. 가을이라 그런지 너무 외롭네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 자꾸만 기억 속의 작은 그 소녀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맴 돕니다. 저기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나를 보며 미소 짓습니다. 작은 코스모스에 그 소녀의 얼굴이 비칩니다. 나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감돕니다. 그리곤 꿈처럼 달콤하게 내 작은 추억 속으로 나의 기억은 흘러듭니다.





소녀와 나


내일이면 난 엄마 곁을 떠나 수학여행을 가야한다. 난 가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가란다. 엄만 내가 싫은 걸까? 요즘 들어 자꾸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자주 나고 그런다. 약을 먹었는데도 낫질 않네...


- 1989년 5월 23일 소녀의 일기 중 



“이제 일어난 거야?”

나는 소녀에게 말을 건넵니다. 소녀는 졸린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그러다 갑자기 나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황급히 다시 방안으로 들어갑니다. 나의 눈동자는 한동안 소녀가 들어간 방문을 향합니다. 

“야 너 거기서 뭐해? 빨리 가자!” 
친구가 멍청히 서 있는 나를 보고 말을 합니다. 
“어, 그..그래...”

난 친구의 뒤를 따릅니다. 소녀는 아마도 안 올 모양입니다. 훗날 나에겐 이때 소녀를 데려가지 않은 일이 큰 아쉬움으로 남겨집니다. 

소녀와 나는 K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같은 반이었습니다. 소녀는 내 건너편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소녀는 언제나 밝아 보였습니다. 그에 비해 난 늘 어두웠지요. 하지만 소녀를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밝아지곤 했습니다. 소녀가 내게 처음 말을 건넨, 5학년 봄소풍 때의 그 심장 박동을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때의 붉게 물든 내 얼굴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만 해요. 소녀와 난 쉬는 시간마다 실을 가지고 놀곤 했지요. 남자 친구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려댔지만, 난 소녀와 함께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어요. 그래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도록까지 실을 놓지 않았었지요. 

나는 지금 여름방학을 앞두고 수학여행을 와 있답니다. 친구를 따라 나선 난 반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소녀를 뒤로 한 채 산으로 향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절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그곳에서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 졸업 앨범 사진 속에는 소녀의 빈자리만 남아 있게 되었지요. 이것이 나에게 남겨진 큰 아쉬움입니다. 촬영을 마치고 우리들에겐 절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난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절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커다란 불상, 웅장한 사찰, 기념관 등이 내 눈에 비추어지고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숙소에 남아 있는 소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야!야! 이거 되게 멋지다!”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칩니다. 난 그제야 정신이 들어 얼떨결에 대답합니다. 

“그...그래. 멋지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 하냐?”
“아,아니. 아무것도...”

친구는 별 싱거운 녀석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잠깐 다녀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러자 나의 마음은 다시 소녀를 향해 달음질을 시작합니다. 그리곤 곧 나의 몸도, 나의 마음을 따라 소녀에게로 향합니다.



물망초


오늘 날씨가 많이 흐리다. 아침에서야 겨우 병원에서 퇴원했다. 엄마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들렀는데 의사 선생님 말씀이 엄마가 내일 밤을 넘기기 힘드실 거란다. 난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 이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을 테니...

- 1989년 5월 27일 소녀의 일기 중 



제일 먼저 숙소에 돌아와 작은 계단 위로 발걸음을 내딛은 나의 눈에 방문을 열고, 방에서 나오는 소녀의 모습이 서립니다. 소녀는 나를 알아보고는 내게로 다가옵니다. 

“저... 아까는 미안해. 금방 자다 깨서 말이야...”
“괜찮아. 난 또... 니가 아픈 줄 알았어.”

소녀는 나를 바라보며 방긋이 미소 짓습니다. 나는 소녀의 해맑은 미소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소녀의 미소 속의 고요함... 그 고요함 속에 소녀의 순수함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야˜! 밥 먹자!”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소녀와 나 사이의 고요함을 깨버립니다. 그리고 곧 아이들이 개미떼처럼 우르르 몰려듭니다. 소녀와 나는 아이들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맙니다. 아이들이 모두 지나 가 버린 후, 난 소녀를 찾았지만, 소녀가 있던 자리에 소녀는 이미 없었습니다. 

“어디 간 거지?”

난 여자 애들의 방문을 슬며시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봅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 다시 조심스레 문을 닫고는 5월의 밝은 아침 햇살이 비치우는 밖을 향해 걸어갑니다. 눈부신 햇살 사이로 홀로 조그만 광장을 거니는 소녀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소녀에게로 다가갑니다.

“혼자 뭐해? 밥 안 먹어?”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웃기만 합니다. 그러나 소녀의 미소 속에는 무언지 모를 우울함이 비춰집니다. 난 소녀에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소녀의 눈치만 살핍니다. 내 눈에 비친 소녀는 그 고요한 눈동자로 가만히 꽃들이 만발한 화원 쪽을 바라봅니다. 

“저건 무슨 꽃이야?”

소녀의 눈동자는 이른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하얀 물망초를 가리킵니다.

“응... 저건 물망초야.”
“물망초? 처음 들어보는 꽃 이름이네. 혹시 꽃말 알아?”
“응. ‘나를 잊지 마세요’ 야.”
“그래...꽃말도 꽃만큼 예쁘다. 우리 5학년 봄소풍 때도 저 꽃이 아주 많이 피어 있었어...”
“으..응.”

난 소녀와 처음 만났던 그 때의 봄소풍을 기억해 봤습니다. 내가 마구 뛰어가다가 넘어졌을 때, 소녀가 내게로 다가왔었지요. 그리곤 ‘괜찮니?’ 하고 말을 건넸어요. 내 가슴은 ‘두근두근’ 그 뒤로 난 소녀를 좋아하게 되었답니다. 

“넌 어떻게 꽃에 대해 그렇게 잘 알아?”
“으,응. 우리 엄마가 꽃집 하시거든.‘
“아, 그렇구나.”

소녀는 다시 꽃을 바라봅니다. 소녀의 눈망울은 햇살에 비치어 반짝거립니다. 나도 꽃을 바라봅니다. 

“저 물망초란 꽃 너무 예쁘다.”
“저 꽃 마음에 드니? 내가 꺾어다 줄까?”       
“아..아니. 그러지마. 저 꽃 주위를 봐. 많은 꽃들이 있잖아. 저 꽃에게 그 꽃들은 모두 가족일거야. 가족들을 떠나서 외톨이가 되어 버리면 너무 가엽잖아...”

순간 소녀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는 듯 했습니다. 햇살이 너무나 눈부셔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소녀의 눈가는 분명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이 며 내게 말을 건넵니다. 

“이제 배고프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응 "

여름날의 해맑은 햇살이 조그만 광장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비춥니다. 둘은 숙소를 향해 정답게 걸어가고, 그들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봄소풍의 기억


현승이에게 찾아갔었다. 엄마에게 물망초 꽃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현승이의 꽃집으로 찾아갔지만 현승인 없었다. 물망초 꽃을 사고 싶었지만 내가 가진 돈은 동전 몇 개뿐이었다. 그래서 난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울었다.


- 1989년 5월 28일 소녀의 일기 중 



“휴˜할일도 되게 없다!” 

봄소풍의 자유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반 아이들은 모두 보물 찾기니, 수건 돌리기니, 장시 다랑이니들하고 있는데, 우리반 애들은 통 놀 줄을 몰라요. 5학년 올라와 첫 여행인데 이게 뭐람... 난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노래를 불러 봅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쉬원한 바람♪”
“야! 우리랑 놀자!”

친구 창수가 다가오며 말합니다. 뒤로는 다섯 명 남짓한 아이들이 꼬리를 지어 따라옵니다. 난 한참 심심하던 차였으므로 창수를 따릅니다.

“무슨 놀이가 좋을까?”

창수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하자, 숨바꼭질을 하자, 말뚝박기를 하자 등등 제풀에 신이 겨워 난리를 칩니다. 결국 우리들은 술래잡기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자! 이제 가위 바위 보로 술레를 정하자.”
“좋아! 가위 바위 보!‘
“으악! 이러언˜!”

이긴 아이들은 기뻐서 폴짝폴짝 뛰며 ‘야호’ 소리를 연발하고, 진 아이들은 인생의 쓴맛을 본 마냥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난 이 중 전자에 속해 있었지요. 창수의 ‘시작한다’ 는 외침과 함께 아이들은 일제히 달음질을 시작합니다. 난 일찌감치 뛰기 시작해 벌써 우리 반과는 아주 떨어진 10반 진영에 들어와 있었지요. 그런데...

“하하! 잡았다.”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디서 나타났는지 창수가 불쑥 뛰어들지 뭐예요. 난 순간 깜짝 놀래서 아무 곳으로나 달음박질을 합니다. 그 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발에 뭔가가 걸리고 맙니다. 

“으아아아아!”

-콰˜당!!!-

머리가 띵하고, 미간으로 짭짜름한 액체가

흘러내립니다. 내가 정신을 수습했을 땐 왠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괜찮니?”

맑게 개인 3월의 푸른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의 추억


엄마가 돌아가셨다. 하늘도 엄마가 돌아가신 걸 슬퍼하는 지 비가 내렸다. 난 엄마에게 마지막 선물을 해 드렸다. 예쁜 물망초 꽃을, 비록 도화지에 그린 그림이었지만 말이다. 엄마는 내 선물을 받아 드시고는 아주 기뻐하셨다. 그래서 난 엄마에게 이 꽃의 꽃말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엄만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더니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그리곤 내 귀에 대고 말씀하셨다. “그래. 우리 연수 엄마가 안 잊을게. 엄만 절대 연수 안 잊어. 그래 안 잊을 거야... 절대, 절대로 영원히...” 그리고 그날 새벽 엄마는 하늘나라로 떠나가셨다... 그리고 난 엄마가 땅속에 묻힐 때까지 계속 울었다. 엄만 흙에 뒤덮이는 그때까지도 내가 준 물망초 꽃을 품에서 놓지 않으셨다...


- 1989년 5월 29일 소녀의 일기 중 



“비가 오네.”
“어, 정말.”

아침 식사를 끝낸 소녀와 난 식당 창문 밖으로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바라봅니다. 나는 소녀를 힐끗이 쳐다봅니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이 왠지 슬퍼 보입니다. 난 갑자기 소녀의 그런 모습을 대하자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나... 저 비를 맞고 싶어.”
“뭐?”

소녀의 엉뚱한 말에 나는 당황해 합니다.

“밖에 나가서 저 비에 내 몸을 흠뻑 적시고 싶어... 너 이러 기분 알아?”
“아..아니. 난 잘 모르겠는걸.”
“그래...”

난 소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난 너무 작았었나 봐요. 소녀는 한참 동안 실망한 빛을 감추지 못하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어디가?”
“걱정마. 비 맞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소녀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합니다. 소녀는 다시 빙긋이 웃으며 말합니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해짐을 느낍니다. 소녀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식당문을 나섭니다. 나도 소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소녀는 현관문 앞 난간에 앉아 흐르는 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 소녀를 멍하니 바라봅니다. 

“야! 너 뭐해!”

친구 창수의 목소리와 함께 뒤통수가 띵해집니다. 창수의 손이 내 머리를 후린 것입니다.

“야! 임마! 넌 말로 하면 안 되냐!”
“니가 하도 바보같이 있으니까 그렇지!‘
“뭐야!‘

순간 나의 눈에 미소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스쳐 지납니다. 난 들었던 손을 슬며시 창수의 어깨에 대며 말합니다. 

“친구, 우리 대화로 해결하세.”
“얼씨구, 너 갑자기 어디 아프냐?”
“...”

난 어쩔 수 없이 창수의 어깨를 그대로 거머쥔 채 방으로 향합니다. 소녀는 여전히 나를 보며 싱글거리며 웃습니다. 난 소녀의 시선을 피하며 방문을 열고 친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문득 소녀를 봅니다. 손으로 입가를 막은 채 쓸쓸히 빗속으로 걸어가는 소녀의 모습을...



이 별


내일이면 난 LA라는 곳으로 작은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간다. 오늘 아침 작은아버지와 선생님께서 얘기하시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내 병이 아주 심한 것 같다. 뇌종양이라는 건데, 치료가 늦어졌단다. 작은아버지는 선생님께 나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그냥 모르는 척 했다. 뇌종양이라고? 그럼 난 앞으로 몇 달을 더 살 수 있는 걸까? 난 빨리 엄마 곁으로 가고 싶다...


- 1989년 5월 31일 소녀의 일기 중 



오후가 되고 날이 개어 모두들 들떠 있을 무렵. 소녀는 몸이 너무 아파 선생님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합니다. 

“비 맞지 않는 다고 했잖아?”
“미안... 그게. 나도... 비 안 맞으려고 했는데... 그 꽃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어... 그.. 근데, 나 요즘 시력이 나빠져서...잘 안 보이는 거 있지?”

-콜록 콜록-

소녀는 추워서인지 몸을 떨고 있었고 소녀의 맑은 눈망울은 촉촉히 젖어 들고 있었습니다. 

“ 괘... 괜찮아?”
“으,응.”
“바보야, 다신 그러지마. 그 꽃 우리집에 많으니까. 아..그..그러니까 다음에 꼭 와 그럼 네가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소녀의 눈가에는 슬픈 물방울 하나가 흔들거립니다. 내 눈 속에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액체들이 흘러내립니다. 

“응... 고마워.”

소녀는 눈가의 물기를 닦으며, 나에게 미소 짓습니다.차문이 ‘덜커덩’ 소리와 함꼐 요란스레 닫히고, 소녀를 태운 차는 어느새 드리워진 무지개를 향해 달려가더니 이내 사라집니다. 그리고 소녀가 떠난 그 자리엔 힘없는 소녀의 미소와 나의 그리움만이 남습니다. 

하루라는 힘든 시간이 지나 내일이 오고 다시 하루가 가고, 그렇게 이틀이란 시간들이 훌쩍 지나 버립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수학여행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단 한 사람 소녀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날 소녀가 그렇게 훌쩍 떠나간 후 다시는 소녀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소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전학을 가 버린 것이지요. 자기 작은아버지를 따라 해외 어딘가로 갔다고 하더군요. 결국 난 소녀에게 물망초 꽃을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훗날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녀는 수학여행 때도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소녀의 아버진 그녀가 5학년 때 사고로 돌아가시고 소녀의 어머니마저도 가난한 생활에 시들린 나머지 몇 달 전부터 큰 병을 앓아 왔다고 합니다. 소녀는 그런 어머니를 두고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소녀가 병원으로 떠나간 날로부터 며칠 뒤 그녀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버리고 소녀는 작은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납니다. 그 뒤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불러 노트 한 권을 건네주셨습니다. 

“연수 일기장이란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너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하더구나... 아..앞으로 연수..보기 힘들 거다...”

나에게 노트를 건네주는 선생님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노트를 건네 받은 내 손 위로 투명한 파란 물감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립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선생님의 눈은 어느새 호수가 되어, 작은 물결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순간 선생님의 큼지막한 손이 내 몸을 휘감고, 내 볼 위로 투명한, 아주 투명한 파란 물감이 하나 둘 흘러내립니다

...



시간이 흐른 뒤 


현승이에게 


현승아, 너에게 떠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이렇게 떠나서 미안해. 말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네. 그래서 이렇게 내 일기장을 너에게 준다. 어차피 내가 죽고 나면 소용없잖아... 네가 잘 간직해 줘. 내가 왜 너한테 일기장 주는 줄 아니? 너 좀 더 크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알게 될 거야... 이제 마지막이다. 잘 보이지는 않겠지만 네 얼굴 한번만 더 보고 가고 싶다... 현승아,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순수하고 착한 현승이로 남아 주었음 좋겠다. 그리고 가끔씩 날 기억해 줘. 아이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그럼... 이 이제 그만 쓸게... 

- 1989년 6월 1일 소녀의 일기 중 



그 날로부터 세월은 어느덧 여덟 살이나 더 나이를 먹어 버렸고, 나에게도 세월은 어김없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 동안 소녀를 계속 그려 왔지만, 소녀는 그날 후로 단 한번도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멈추고, 나를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던 코스모스도 잠이 듭니다. 평소 외출을 별로 하지 않는 나였지만 오늘은 모처럼 만에 동창회가 있는 날이라서 이렇게 집에서 나와 약속 장소로 걸어갑니다.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정확히 8년하고도 몇 개월쯤은 되었으니까요. 내 눈앞으로 약속 장소가 보입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그 곳으로 들러가고 있습니다. 

“연수가 왔을까?”

난 또 다시 소녀를 떠올립니다. 소녀가 와 있을 확률은 희박했지만, 난 작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래... 혹시 몰라.”

난 용궁 해물탕이라고 씌어 있는 가게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안에는 낯익은 얼굴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뒤범벅이 된 채 나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연수는 안 왔군...”

나도 모르게 발길을 돌립니다. 그때 문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야! 이현승!” 

뒤를 돌아보는 나를 향해, 그녀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듭니다. 창수였지요. 

“이 자식! 오랜만이다. 하하!”
“어... 그래. 반가워.”

난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보자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감돕니다. 

‘그래. 이런 친구들도 있구나... 연수가 내 초등학교 시절의 전분 아니였어...’

난 잠시 소녀를 잊은 채 그들 속에 파묻힙니다. 오랜만에 느끼는 화목함, 따뜻함, 그 시절에느 모르고 지내 왔건 친구들 간의 우정의 포근함 속에서 나는 삶이란 것의 행복을 생각해 봅니다. 

시간은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어느새 다시 헤어져야하는 순간이 나를 찾아듭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제각기 떠나 버리고, 나는 창수와 함께 길을 거닙니다. 

“저, 창수야, 너 혹시 연수 소식 못 들었냐?”
“연수? 아 그 엄마 죽고 해외로 이민간 애. 글쎄다 내가 듣기로는 뇌종양인가로 죽었다던...”
“그...그래.”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현실의 고통은 그보다 가혹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고 해야 할까요? 내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윽하게 고입니다. 난 옷소매로 눈가를 훌쩍 훔칩니다. 

“창수야, 나 먼저 가야겠다.”
“아니, 왜?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동안 쌓인 얘기도 좀 해야지.”
“오늘 좀 급한 약속이 있어서.”
“그러냐? 할 수 없지 그럼. 그럼 내 연락처하고 줄 테니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해라.”

난 창수가 주는 쪽지를 받는 둥 마는 둥 받아들고는 안녕이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는 돌아섭니다. 돌아서는 내 발길 위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흩어집니다.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든 채 말없이 쨍한 낮의 종말을 알립니다. 바람이 서늘히 불어와 젖은 내 볼에 차갑게 부딪힙니다. 지금의 하늘처럼 붉은 잎사귀들은 여전히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립니다. 난 ‘후˜’하고 길게 한 숨을 내쉽니다. 그리곤 낙엽이 분분한 붉게 물든 길가를 아쉬운 발걸음으로 스쳐갑니다.



에필로그


오랜만에 다시 일기를 쓴다. 한 8년쯤 됐나? 그 아이에게 내 일기장을 맡긴지가 8년이 됐으니... 오늘 동창회에 참석하려고 가던 중 길가에서 그 애를 만났다. 그 앤 집으로 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마 시간을 잘못 알았나 보다. 저녁때쯤인 줄 알았는데. 그 앤 날 보고 굉장히 놀란 것 같았다. 내 앞에서 연신 눈을 비벼 댔으니... LA에 가서 신속히 수술을 받아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수술 후 후유증으로 4년간 병원에 누워있긴 했지만... 그땐 나도 죽는 줄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모든 게 꿈만 같다. 오늘 그 애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며 집을 나섰는데, 하마터면 못 만날 뻔했네. 하느님 감사해요. 내가 좋아하던 그 애... 물망초를 화분에 꽂아 놓고 나니 너무 좋다. 아˜오늘밤은 잠을 못 잘 것 같다.

- 1997년 10월 5일 연수의 일기 중 



길가를 헤매던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다 타 들어간 해는 산너머로 넘어가며 내일의 따스한 햇살을 기약하듯 마지막 빛을 내뿜고, 그 주홍빛은 내 두 뺨 위로 다가와 차가워진 내 두 볼을 따스히 비춥니다. 갑자기 나를 비춘 따스함에 난 훈훈함을 느낍니다. 바람도 어느새 멈추어 버립니다. 길가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따스한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주위가 갑자기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드네요. 건너편 정류장으로 사람을 가득 태운 버스가 달려와 멈춥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토해내고는 다시 달려갑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북적댑니다. 파란 불로 바뀐 신호등은 어느새 깜박거립니다. 버스에서 내린 한 여인이 그것을 보고 달려옵니다. 내 시선은 한참 동안 그녀를 향합니다. 여인은 내가 있는 곳까지 간신히 건너와 가쁜 숨을 몰아 쉽니다. 그러는 동안 집으로 가는 버스가 달려와 내 앞에 멈추어 섭니다. 난 옷깃을 여미고 버스에 오르기 위해 한 발을 내딛습니다. 

“현승아!”

바람조차 멈추어 버린 어둠 속의 고요를 뚫고 한 여인의 목소리가 내 귀를 타고 흘러 들어와 내 마음 속 작은 호수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난 버스를 뒤로 한 채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봅니다. 방금 길을 건너온 여인의 목소리였습니다. 순간 난 하늘이 무너질 듯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여...연수?”

계절이 지나가는 맑은 밤하늘 위엔 어느새 별들이 총총히 새겨져 두 사람을 비춥니다. 별이 반짝이네요. 마치 지난 5월, 이른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던 하얀 물망초처럼.



1997. 10월. 멀고느린구름 



* 이제는 무려 17년 전에 쓴 소설이네요. 부산 다대고등학교 창간호 교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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