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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응답하라 1930

멀고느린구름 2014. 1. 18. 09:05

응답하라 1930



  어째서인지 나는 1930년대에 마음이 간다. 조국으로서는 일제의 식민지 압제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을 때인데 괘씸하게도 나는 그 시절의 것들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1930년대라면 이상과 황순원, 김동인 내가 좋아하는 근대 소설가들이 모두 청년이던 시절이다. 젊은이들은 조국 독립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 만주와 러시아 일대를 뛰어다니고 있을 때이며,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대변혁을 이루고 있을 시기다. 


  안정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불안하거나 불안의 징조를 품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산천은 푸르렀고, 아마도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했으리라. 깊은 밤이 오면 외로움에 떨며 서로를 껴안았을 것이고, 보름달보다도 형형히 빛나는 원대한 이상을 각자의 가슴에 품었으리라.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어렵게 구해 읽었을 것이고, 아직 팔딱팔딱 살아있는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선언이 청년 사회주의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안정적인 생활을 도모하는 이들은 유약한 현실론자라거나 조국을 등진 패배주의자라고 비난 받았을 터다. 오직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들만이, 가망 없는 꿈을 꾸는  이들만이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저마다의 진의를 증명하기 위해 각자의 불꽃을 피웠을 나날들이 1930년대에는 도처에 있지 않았겠나. 


   근대의 문명의 꽃을 피워내기 시작하던 건물들은 아직 온 산하를 덮기 이전이었고, 자연과 문명이 일정 수준 균형을 이뤘겠고, 민족주의자와 녹색주의자,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 역시 비등한 균형을 이루며 조국의 추를 맞추어 갔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부끄러움을 노래했고, 백석 시인은 흰 바람벽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고, 지식인들은 누구나 변혁하는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 자신을 자각하려 했다. 그 시절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떨린다. 


  지독한 불안과 불온함 속에서야 인간의 영혼은 가장 고결한 빛을 발한다. 물론, 내가 그 시절을 아름답다고 감히 표현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과거의 일이기 때문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그림액자 속의 한 장면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지금에야 아름답지만, 그것을 그리던 시절의 고흐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한 민족에게 그런 빛나던 한 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축복할 일이다. 우리에게 저항과 승리의 역사가 아닌 패배와 굴종, 순응의 역사만이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결코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입에 담지 못했을 테니까. 


  가끔 일부러 오래된 영화들을 찾아본다. 1950년대나 1960년대에 제작된 영화들. 그 속에서 1930년대의 흔적들을 살핀다. 복고주의자가 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을 더 가치있게 살기 위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해 그 시절의 빛들을 복기해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개혁의 반대편에 서있다고 비판하는 7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태어나거나 빛나던 시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사람을 정치적으로 미워하고 비난하는 일이 얼마나 야속한 일인가.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시대의 빛을 점점 잃어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거늘. 


  역사를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사건의 연대기를 암기하는 일이 아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시대의 빛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 시절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는 일이다. 자꾸만 추해지고 마는 나약한 사람의 시간 속에서, 그 시간과 무관하게 남아 있는 빛들을 되돌아본다. 우리는 아직  1930년대의 빛들이 꾼 꿈에 응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에겐 새 정치의 팬덤이 되는 일보다 이 질문에 각자의 대답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다. 



2014. 1. 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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