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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탁스 G렌즈, 그리움의 빛을 담다 



내가 현재 쓰고 있는 카메라는 올림푸스에서 미러리스의 역사를 새로 쓰면서 출시한 E - P1, 통칭 펜(PEN)이라고 불리는 기종이다. 이 카메라를 처음 본 순간 이 녀석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나의 이상을 실현해줄 카메라는. 


어릴 적부터 카메라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여느 집에나 있을 법한 흔한 똑딱이 카메라가 집에 한 대 있었고, 그것도 별로 쓰임이 많질 않아서 다락방 어딘가에 먼지를 먹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교 22살이 될 무렵까지 휴대폰 하나 갖고 있지 않았던 나는 특별히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22살이 되던 어느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중국에서 제작된 싸구려 디카를 하나 사게 되었다. 그 녀석의 애칭은 '파람이'였다. 


이후 나는 어쩌다가 보니 매일 매일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 - 바로, 정훈장교 - 을 갖게 되었고, 일에 걸맞는 사진기를 하나 가져야겠다고 생각해서 삼성에서 나온 슈나이더 렌즈라는 것이 달린 제품을 하나 구입하게 되었다. 애칭은 '슈나이더'. 슈나이더와 나의 인연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산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슈나이더의 고장과 함께 나는 좀 더 수준이 높은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안 되는 곳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큰 마음을 먹고 당시 핫했던 카메라를 구입했으니... 그것이 바로 앞서 소개한 E-P1이다. 


22살부터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으니, 나의 촬영 인생도 이제 제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사진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파람이를 구입한 것도 단지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나를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시간을 남겨두고 싶었었다. 


그러던 중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고, 결정적으로 나는 사진에 심취하게 됐다. 무슨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집이 아니라 김영하 소설가가 쓴 <여행자 - 하이델베르크>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김영하 소설가가 '콘탁스 G1'이라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하이델베르크의 거리를 담은 사진들이 잔뜩 실려 있다. 나는 GOP의 엄혹한 환경에서 근무하며 이 사진들 속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콘탁스 G렌즈로 담아낸 사진들에는 묘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 기운을 '그리움의 빛'이라고 표현한다. 


E-P1과 콘탁스 G렌즈, 그리고 운명의 책 <여행자>


사람에게는 저마다 특히 끌리는 아름다움이 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란 결국 빛의 문제이다. 어떤 빛을 선호하는가 하는 문제다. 내가 좋아하는 빛은 새벽의 어스름 빛, 그리고 해질 무렵의 노을 빛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이미 떠나가고 있는 것. 나는 그런 것들에 이끌린다. 그런 것들이, 그런 감정이, 그런 순간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런 탓인지 <여행자> 이후 찾아보게 된 사진집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집이었다. 그가 남긴 결정적인 순간들 속에는 '그리움의 빛'이 담겨 있었다. 


이제 나에게는 '그리움의 빛'을 사진 속에 담는 일이 숙원이 되었다. 당연히 남대문의 카메라 점포를 온통 뒤지고 다니며 콘탁스 G 렌즈를 찾아냈다. 당시 필름을 사고, 인화를 할 여건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콘탁스 G 렌즈를 맞물려 사용할 디지털 카메라가 필요했다. 그때 선택된 것이 바로 E-P1이었다. 그 카메라를 처음 본 순간 그녀석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콘탁스 G1 카메라와 몸체가 몹시도 닮아 있던 E-P1이야 말로 진정 '그리움의 빛'을 담아낼 카메라로 여겨졌다. 



비틀즈의 앨범 속에 담긴 이런 사진들을 찍고 싶었다



E-P1과 함께 나는 수많은 산과 들, 거리를 다니며 '그리움의 빛'을 담아냈다.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나는 그야말로 수 만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몰래 가져온 몇 장의 사진마저 맥 하드가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소실되고 없다. 그때의 사진들은 말 그대로 그리움의 빛이 되고 말았다. 








E-P1과 Contax G렌즈로 찍은 사진들


E-P1과 콘탁스 G 렌즈로 제법 좋은 사진을 많이 찍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딘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김영하 소설가가 찍은 책 속의 사진들과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콘탁스 G1으로 찍었다는 다른 사진들과 내 사진은 많이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기 보다는 내 사진 속에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G렌즈만의 무엇이 결여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사실, 가장 결정적인 '그리움의 빛'이었다. 


콘탁스 G  렌즈는 독일 칼 자이즈사의 네임벨류를 달고 있지만 사실은 이제는 없어진 일본 교세라사에서 제작한 것이다. 45mm의 G렌즈는 지금까지 세계에 등장한 모든 렌즈를 통틀어 두 번째로 훌륭한 렌즈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명품이다. 문제는 이 렌즈가 콘탁스 G1이라는 필름 카메라의 전용 렌즈로 제작되었고, 두 기기간의 조합을 이룰 때야 비로소 최적의 빛을 담아낸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내가 찍고 있는 사진은 반쪽인 것만 같아 어느 시점부터 사진 찍는 일이 시들해지고 말았다. 차라리 필름 카메라를 사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 형편에 사치를 부리는 일 같아 선뜻 마음이 나질 않았다. 이대로 영영 제대로 된 '그리움의 빛'을 담아내는 일은 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낙심하고 있던 최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과거 콘탁스를 제작했던 교세라사의 마지막 엔지니어가 현재도 카메라를 만들고 있는 소니사에 스카웃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니사는 보란듯이 'RX10'이라고 하는 콘탁스 카메라의 디지털판과 같은 제품을 내놓았다. 이 카메라로 찍었다는 이미지들 속에는 과연 과거 콘탁스의 빛이 남아 있어 보였다. 


며칠 전에는 밤을 세워 외국 사이트의 사진을 들춰보게 되었다. 근래 출시한 풀프레임의 미러리스 카메라 소니 A7과 콘탁스 G렌즈를 결합하여 촬영한 외국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다. 상당히 필름 카메라의 빛을 회복한 느낌이었다. 어둠이 내리고 새벽 빛이 밝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빛을 담고 간직하는 일에 생각보다 훨씬 더 기쁨을 느끼고 감격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체의 생김새가 그리 탐탁지 않아 망설이고 있지만 아마도 결국 나는 소니사의 카메라를 구입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또한 아마도 영영 '그리움의 빛'을 담아내는 이 콘탁스 G 렌즈들을 사랑할 것만 같다.  



2014. 2. 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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