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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나의 진료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간호를 하던 딸과 눈이 마주쳤다. 딸은 소년보다 한 살이 어렸고 아름다웠다. 딸은 소년이 생각하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단발 머리모양과 하얀 피부, 붉은 입술, 드러날 듯 말듯 여리게 솟은 가슴. 가는 팔과 다리. 무심한 듯 자상한 성격. 소년은 딸에게 첫 눈에 반했다. 첫 눈에 딸이 자신의 여자임을 알았다. 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딸은 소년에게 물었다. 그 깡패들한테 왜 쫓기고 있었어요? 소년은 침묵했다. 쫓기고 있던 건 맞아요? 답하지 않았다. 저한테 반했어요? 소년은 답할 수 없었다. 딸은 답을 들었다. 딸이 말했다. 이렇게 맞고 다니지 마요. 슬프잖아요. 소년은 다시는 맞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방법을 알려줄까요. 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말했다.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건 어려워요. 오빠가 그 사람들 다를 이길 순 없어요. 오빠 맞죠? J중 3학년. 저는 오빠 옆에 있어요. S여중 2학년. 난 아무도 못 건드려요. 비법을 알려줄까요. 소년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되세요. 소년은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는 노래는 들어본 적이 있다. 신이 되는 방법은 간단해요. 신의 가장 큰 힘이 뭐겠어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죠.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일어날 수 없었다. 무엇엔가 결박당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 아무 것도 자신을 결박하고 있지 않았다. 딸은 소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딸의 눈은 검고 깊다. 소년은 딸의 눈 속으로 침잠한다. 검은 우물 속으로 한 없이 가라앉는다. 점점 빛이 사라진다. 오빠에게 신의 권리를 주겠어요. 신이 되세요. 신이 되세요. 


  소년은 다시 눈을 떴다. 딸은 더 이상 소년의 곁에 없었다. 나는 소년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양호했다. 소년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소년은 상쾌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아저씬 누구세요? 

너와 부딪친 사람이야. 

제가요? 

골목에서 뛰어오다가 내 차에 부딪쳤어. 

죽은 건가요? 

그럴리가. 

산 건 가요? 

아마도, 몸은 정말 괜찮니?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구나. 

다행이네요... 그런데. 

은희?

아, 이름이 은흰가요?

은희지.

어디로...

학교에 갔지. 넌 벌써 이틀째 거기 잠들어 있었다. 지금은 낮 11시고. 전화번호고 뭐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서 네 교복과 명찰을 보고 학교에 전화를 해봤더니 보호자가 마땅히 없는 상황이더구나. 그래서 그냥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걱정마라. 난 의사야. 정신과지만. 

여긴 병원인가요 그럼. 

병원 겸 집이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열을 확인하려는 듯이 이마에 손을 짚어 보더니 말했다. 


뭔가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사람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지. 

왜 그렇죠?

왜일까? 갑자기 영혼이 뒤바뀐 건지도 모르지. 혹은 없던 영혼이 갑자기 생겨나거나 말이야. 

의산데 그런 걸 믿으세요?

안 믿지. 

그런데 왜 저한테 그런 얘길 하세요. 

어린 애니까. 


소년은 입을 굳게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안 보이도록 돌아눕더니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더 자라. 여기 불은 꺼줄게. 


불을 끄자 순식간에 어둠이 들어찼다. 소년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년이 세 번째로 눈을 떴을 때 소년은 자신의 집에 돌아와 있었다. 활짝 열린 창으로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목소리였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집인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너희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다시 그 목소리. 소년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팠다.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세상은 물에 잠기고 불에 탈 것이다. 너는 진실로 그날을 앞당겨야 한다. 귓구멍을 아무리 파도 목소리는 들려왔다. 이명이 생겼다. 소년은 두려움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네 앞의 잔에 든 물을 마셔라. 너는 진실로 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것이니. 천국에 임하는 좁은문이 네 앞에 있도다. 소년의 앞에는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유리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익숙한 유리잔이었다. 어머니가 아끼던 유리잔이다. 누가 떠놓았는지 투명한 액체가 담겨 있다. 마셔라. 목소리는 단호했다. 소년은 움찔 놀라며 유리잔 속의 액체를 들이켰다. 보통 물맛이다. 진실로 나의 자녀가 된 네게 불의를 벌할 권능을 주노라. 너는 살인을 하여도 살인자가 되지 않고, 너의 죄는 죄가 아닌 열쇠가 될 것이다. 소년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신의 말씀을 받들었다. 아멘. 


  소년의 삶은 달라졌다. 소년의 표정은 밝아졌으며 발걸음은 경쾌해졌다. 소년은 사랑에 빠졌고, 소년은 비로소 자기 인생의 주연이 되었다. 소년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았고, 미래의 도래를 막연히 기다리지도 않았다. 소년은 현재를 계획했고 추진력 있게 실천했다. 첫 번째 살해 목표는 박 군이었다. 




2013. 8.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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