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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여자와 넋이 나간 남자를 싣고 오리배는 호수의 중심부를 지나 바람을 따라 지류를 향해 떠가고 있다. 그녀의 눈물이 멈춘다. 정신이 돌아온다. 오리배는 알 수 없는 하류로 자신들을 실어가고 있다. 


여기가 어디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남의 정신도 그제야 돌아온다. 


그... 글쎄. 어디지. 


그녀는 다시 울고 싶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물결에 떠내려온 거니까. 반대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원래 장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이전부터 그남이 지나치게 똑똑한 채 하는 것이 거슬렸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아니다. 그녀는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오리배의 패달을 찾아 밟는다. 그남도 아무 말 없이 패달을 밟는다. 


우선, 방향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오리배는 전속력을 다해 하류로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남이 방향키를 잡고 오리배를 뒤로 돌린다. 생각보다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일은 힘이 든다. 땀이 흐를 정도로 패달을 밟아보지만 얼마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그녀와 그남은 거의 동시에 패달에서 발을 물린다. 배는 등을 돌린 채 다시 하류로 떠내려간다. 그녀는 그남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본다. 잠시지만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남은 손목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닦아낸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녀가 묻는다. 


낭떠러지.


그남이 답한다. 


여전하구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다. 


할 수 없잖아. 


그남은 오리배의 갑판에 등을 대고 반쯤 누워버린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다. 


어떻게 나한테 말을 걸 생각을 했어?

응?

응이라니... 

글쎄, 반가워서 아니었을까.

반갑다고?

응... 아마도... 

넌 죽은 친구의 옛날 여친이 반갑니?

어? 죽다니?

몰라!?

모르는데...?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녀의 눈 속에 그남의 얼굴이 만월처럼 담긴 것을 그남은 알아챈다. 그녀가 두 번째 남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제서야 그남은 자신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음을 알게 된다.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그저 꿈인가 싶다. 떠올리려 해도 친구의 모습이 좀처럼 떠올리지 않는다. 그제야 회한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남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그남이 어미를 잃은 짐승처럼 오열한다. 적막한 밤의 대기 속으로 그남의 울음소리가 번진다. 그녀는 그남의 울음은 그 자신을 위한 제의일 거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그남의 곁을 지켜준다. 그남을 안지는 않는다. 얼마 뒤 울음이 잦아든다. 그녀가 그남에게 묻는다.


슬프니?

뭐...?

슬프...냐고.

당연하지!

당연한 거니...?

당연하지!


그남은 큰 소리를 쳤지만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그남 너머의 그남을, 시간 너머의 시간을, 삶 너머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그남은 자신이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 더 이상 슬프지 않네... 난. 그 아이 불쌍하단 생각은 여전히 가끔 해. 

응...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대답하네. 

이해해... 

그러니?

나, 다음 주에 결혼해. 이거 약혼 반지. 


그녀가 왼 손 약지에 낀 은빛 반지를 들어보인다.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잘 어울리는 은빛이라고 그남은 생각한다. 그남은 누군가에게 약혼 반지를 선물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으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쳐 조금 쓸쓸해진다. 꼿꼿이 등을 세우고 있던 그녀가 그남의 옆으로 다가와 그남처럼 비스듬이 등을 기대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녀에게서 향수 내음이 흘러든다. 이제야 그남은 그녀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잘 됐어. 

뭐가?

널 만난 거 말야. 

왜?

언제나... 언제나 말야. 언젠가 널 만나면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마음 먹고 살았거든 나. 

어??

이걸로 됐어. 소원을 푼 셈으로 치겠어. 

아니... 저기... 어째서 그런 소원을 갖고 살지 않으면 안 된 거야. 아, 질문이 너무 복잡하네. 그러니까. 어째서야. 어째서인 거야.

궁금하니? 궁금하면 오백 원!

재밌어? 

응. 쪼금. 


그녀가 또 한 번 피식 웃는다. 역시, 그녀의 피식은 다른 사람은 누구도 갖지 못한 피식이라고 그남은 확신한다. 그녀는 입을 다문다. 절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기세란 걸 그남은 잘 알고 있다. 그남은 포기하고 밤 하늘을 올려다본다. 


있지... 너, 노래 잘했었지?

뭐... 아마도. 

아무거나 하나 불러줘. 

아무거나라면 어떤 아무거나. 

다시 목을 조를까? 

알았어. 잠깐만, 잠깐만. 


그남은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날 보고 있나요... 별이 지는 저 하늘 위에선 너무도 작은 나이겠죠... 

별이 가득한 어느 여름밤... 꿈꾸듯 내게 말했죠... 그대 영원히 머물 곳은... 

저 하늘 너머라고... 그 어디쯤 있나요... 내게 닿을 순 없나요.... 


전람회의 새. 11년 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다. 저음과 중음을 오가는 그남의 목소리가 대기 중에 물결을 만든다. 강의 물결과 허공의 물결. 두 개의 물결이 함께 두 사람을 어디론가 실어간다. 그남의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조그맣게 박수를 쳐준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쉰다. 그녀는 갑판에서 등을 떼고 몸을 웅크린다. 얼굴을 무릎 사이로 파묻는다. 그남도 가만히 자세를 고쳐 앉는다. 


너 말야... 

응. 

웃기는 얘기다. 10년 전이야 벌써... 너, 걔한테 나 좋아한다고 술 자리에서 고백했다며. 그리곤 다음 날 나나 걔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도망갔었지. 

아아... 그랬었지. 

아아... 그랬었지... 라고... 그래, 사람은 그래. 다들 무책임하지.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좀처럼 확인하려 하지 않거든. 나도 그래. 그래서 별 할 말은 없지. 널 탓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그렇잖아.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필요한 거야.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너 일본으로 사라지고 걔가 한참 널 찾았어. 그러다가 나한테 헤어져야겠다고 말하더라. 이미 군입대 신청을 다 해놓고선.


그남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그녀는 무심히 그런 그남의 얼굴을 본다. 더 이상 살의는 일지 않는다. 연신 흔들거리며 흘러내려가던 오리배가 멈춘다. 지류의 끝이다. 주변에는 무성한 들풀밖에 보이지 않는다. 뜻밖의 불청객에 놀란 풀벌레들이 쏴아 일제히 울음을 운다.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에는 밤과 낮이 함께 물들어 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남의 언 손을 녹인다. 


정말 정말 죽여버리고 싶었어...  




2013. 8. 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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