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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찬스 3

멀고느린구름 2013. 8. 3. 10:57




 수성못에는 떨어진 별빛 같은 조명들이 촘촘하게 켜져 있다. 그녀가 수성못에 내린 까닭은 그남을 통해 오래전에 죽은 그녀의 두 번째 남자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두 번째 남자는 대구에서 태어나 강원도 양구에서 생을 마감했다. 군에서는 총기 오발 사고라고 했다. 부대에 배치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첫 야간 GOP 근무를 서던 중 전방에서 들린 동물의 기척을 듣고 깜짝 놀라 자신을 향해 총을 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 근무에 투입되기 전 두번 째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초병 임무쯤은 식은 죽 먹기니까 걱정 말라고 했었다. 그녀가 세 번째 남자를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6년 뒤 거짓말처럼 그녀는 두 번째 남자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지워버렸고, 당연히 그남에 대해서도 지워버렸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살아난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그녀는 하염없이 호수의 둘레를 걷는다. 호수는 별빛과 인공의 빛들을 모두 안고 힘겹게 흔들리고 있다. 바람이 간간이 분다. 다행히 열대야는 아니다. 호수 한 편에 모여 있는 오리배들을 발견한다. 그녀는 그리로 걷는다. 


   진정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남은 그녀가 편의점에서 나와 - 그것도 포도맛 폴라포를 입에 물고 - 택시에 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남은 곧 뒤이어 도착한 택시를 잡아 앞의 택시를 추격해줄 것을 부탁했다. 택시 운전사는 그남을 흘끗 쳐다보았고 검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모습을 본 후 적이 안심이 되어 손님의 주문을 수락했다. 택시가 수성못 앞에서 멈추는 것을 보고 그남은 100미터 정도 뒤에서 차를 멈추고 내렸다. 그남은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그남의 첫사랑이었고, 가장 친했던 친구의 연인이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는 지금은 연락이 끊겨 전혀 소식도 알지 못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만. 그남은 그녀에게서 친구의 소식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혹, 그녀가 지금은 친구의 아내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자신은 참말로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친구의 아내를 미행하고 있다니. 확실한 건 지금에 와서 그녀에게 고백을 해볼까 하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그남은 생각의 정리를 유보하고 있다. 본능과 직관에 자신의 육체를 내맡긴 채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그녀가 오리배가 모여 있는 쪽을 향해 걷는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시계를 본다. 저녁 8시가 넘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하현의 달이 무성의한 빛을 드리우고 있다. 그남도 오리배의 집단 서식지를 향해 걷는다. 


  오리배가 있는 곳에 도착한 그녀는 선착장 위에 풀썩 앉아버린다. 다리가 아프다. 오리배가 하나, 둘... 열 넷, 열 다섯 마리. 그 중 열 네 마리는 만약 타려고 한다면 헤엄을 쳐서 가야하는 곳에 있다. 헌데 한 마리의 오리배는 마치 그녀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선착장 끝머리에 정박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리 와보라고 유혹하고 있다. 그녀는 오리의 유혹을 무심히 흘려넘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현의 달이다. 야자와 아이라는 일본 만화가의 <하현의 달>을 떠올린다. 하현의 밤, 시간의 틈새에 갇혀버린 여자의 이야기.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시간은 언제나 흐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시간은 멈춰 있다. 그녀의 6년이 그랬다. 그녀는 달의 옆에다 두 번째 남자의 얼굴을 그려보려 한다. 그려지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다. 눈이 선했던 것 같다. 머리카락은 조금 곱슬거렸던 것 같다. 손가락은 길었나 짧았나. 목소리는 연예인 중의 누구를 닮았던가. 글쎄, 이렇게 불확실한 것을 두 번째 남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언젠가 사라지고 만다. 사람은 사라지고 만다. ‘사람’과 ‘사라짐’은 서로 닮았구나. 


저기...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반사적으로 오리배 쪽으로 달린다. 세상에 따라오다니, 끔찍해. 공포감을 누군가 핏속에 섞어버린 듯한 기분. 그녀는 오리배로 뛰어오른다. 묶여 있지 않던 오리배가 반동 탓에 호수 중앙을 향해 밀려나기 시작한다. 그남은 있는 힘껏 달려 오리배를 향해 점프한다. 휘청. 오리배가 크게 휘청했지만 가라앉지는 않는다. 호수의 중앙을 향해 무심히 흘러가는 오리배 위에는 공포에 사로잡힌 그녀와 땀 범벅이 된 그남이 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대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남은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그녀는 그남이 한 마디라도 시작하면 그남의 목을 졸라버려야겠다고 다짐한다. 온갖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울려퍼진다. 


저...


이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남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른다. 그남은 정신이 아뜩해짐을 느낀다. 목을 누르는 그녀의 손을 도저히 뗄 수가 없다. 이건 진짜다. 머리가 백지가 되자, 생존 본능만이 선명해진다. 그남은 발로 그녀의 배를 힘껏 차버린다. 그녀가 오리의 목쪽으로 내동댕이쳐진다. 그남이 쿨럭거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죽지 않았다. 그남은 생전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이 처음이다. 내동댕이 쳐진 그녀가 정신을 수습하고 그남을 노려본다. 적의가 가득한 눈빛이다. 곧 다시 달려들 것 같다. 그남은 침을 꿀꺽 삼킨다. 은사의 장례식에 가려다가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고 만 남자의 이야기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살아야 한다. 그남의 창의성이 마구 살아난다. 그남은 스마트폰을 꺼내 허겁지겁 메모장에 글을 쓴다. 맞춤법이 영 엉망이다. 맞춤법을 맞추는 것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가, 조금 틀리는 것이 인간적으로 여겨질 것인가. 


‘미아네. 진정하고. 5분만 진정하는 시간을 가자. 그동안 난 암 것도 안하게.’ 


그저 급하게 써서 그녀를 향해 내보인다. 스마트폰의 하얀 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그녀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춘다. 그녀가 갑자기 쏟아진 빛 탓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남이 흠칫 놀란다. 정신을 차리고 동의하느냐는 뜻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몇 번 끄덕여 보인다. 그녀가 조금 누그러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남은 재빨리 스마트폰의 불빛을 꺼버린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만 깊게 내쉰다. 적막이 오리배를 덮는다. 풀벌레의 오케스트라가 끝나지 않는 악장을 연주한다. 간간이 물결이 오리배에 부딪힌다. 오리배가 흔들린다. 그녀는 요람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남은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한다. 조금 마음이 놓인다. 아아...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거지. 그녀는 눈시울이 젖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르겠다. 내버려둔다. 눈물이 그렁그렁 모이더니 한 방울씩 오리배의 갑판 위로 뚝뚝 떨어진다. 죽음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그남의 머릿속은 그저 하얗기만 하다.  




2013. 8.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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