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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꿈에서 의사의 딸을 보았다.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거리에 딸은 서 있었다. 소년은 딸에게 다가갔다. 딸은 멀어졌다. 소년은 다시 다가갔다. 딸은 다시 멀어졌다. 같은 극의 자석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거리를 유지한 채 멈추어 섰다. 검은 허공이 조금씩 조금씩 두 사람을 어디론가 운반해 가고 있었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원래의 자리에서 지나치게 멀리 와버렸음을 느꼈다. 허나 돌아가야 할 곳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어둠, 어둠만이 가득했다. 의사의 딸도 어둠에 묻혀버렸다. 소년은 딸의 생김새를 잊어버렸다.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누구였던가도 잊었다. 소년에게는 두근거렸던 심장만이, 사랑의 육체만이 남았다. 이내 그것마저도 지워졌다. 소년이 지워졌다. 어둠만이 남았다. 소년은 모든 것이 사라진 것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소년은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눈을 떴다. 붉고 푸른 불빛이 번갈아 가며 창밖에서 명멸했다. 경찰이 온 것을 직감했다. 발각됐구나. 소년은 침착하게 궁리했다. 그래도 김 군은 죽여야 한다. 전주 곡만 있는 악곡은 가치가 없다. 경찰을 죽이는 일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경찰 역시 소년을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창밖에서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경찰의 목소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짖으라지. 소년은 동원된 경찰의 규모를 확인했다. 경찰차가 3대. 눈에 보이는 인원만 10여명이었다. 탈출할 방법은 아무래도 없었다. 소년은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마지막 살해 목표를 김 군이 아닌 자신으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자신이 자신에게 살해 당하는 것으로도 제법 괜찮은 악곡 하나는 완성되겠다. 소년은 학생주임의 피가 묻은 식칼을 꺼내 들었다. 어디를 찔러야 가장 신속정확할지 몰랐다.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다면 평소에 좀 더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누군가 가장 효율적인 자기 살해법을 일러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순간, 내가 교회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소년은 주춤했다. 나다, 나야! 내가 소리치자 소년은 식칼을 쥔 손에 힘을 빼고, 어깨를 편하게 늘어뜨렸다. 나는 경찰차가 빠르게 마을 언덕을 올라가는 것을 목격하고 혹시나 싶어 뒤따라 왔다고 전했다.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나는 소년에게 그간의 일들을 편하게 이야기해주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소년은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다고 말했다. 나는 경찰 간부에게 부탁했다. 사이렌 소리가 꺼지고 경찰들은 교회당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포위망을 만들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았다. 소년에게도 앉으라고 했다. 소년은 앉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되도록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소년의 살해담을 들었다. 비교적 깨끗한 살인이었다. 적어도 사체를 토막내거나 불태우지는 않았다. 나는 소년에게 소년은 소년이므로 아무리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사형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살해 당한 자들이 소년에게 한 행위에 대해서 좀 더 과장되게 증언을 한다면 소년에게 유리한 법리적 해석이 적용될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소년은 그딴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다만 김 군을 죽이고 싶다고 했다. 소년에게 김 군은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소년은 왜냐고 물었다. 나는 김 군은 자살했다고 말해주었다. 김 군은 너한테 죽을까봐 무서워서 어젯밤  자기 집 옥상에서 뛰어내려 즉사했어. 소년은 몸을 떨었다. 무섭냐고 묻자, 소년은 화가 나서 치가 떨리는 거라고 답했다. 서늘한 목소리로 자기가 죽였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서둘러 교회당을 빠져 나오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경찰에게 소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드럽게 경찰서로 데려가도록 요청하겠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년이 물었다. 아저씨 딸은 잘 있어요? 나도 모르게 소년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소년의 눈이 적의로 가득 차 흔들렸다. 멋진 눈빛이라고 느꼈다. 


잘 있지 물론, 하지만 더 이상 내 딸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왜요?

왜라니? 넌 살인자잖아. 지금 니 손을 봐. 더러운 게... 


소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피로 얼룩져 붉게 변해버린 손. 그틈에 나는 재빨리 교회당을 나서 경찰에게 소년을 곧바로 포획하라고 일렀다. 경찰 간부는 ‘포획’이라는 단어를 듣고 다소 인상을 찌푸렸다. 덮쳐! 간부의 우렁찬 지시에 따라 일제히 경찰이 교회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교회당 안에서 경찰들이 포획한 것은 이미 살아 있는 소년이 아니었다. 두 눈을 부릅 뜬 채 죽은 소년의 복부에서는 쉼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김 군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다고 전했다. 




2013. 8. 2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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