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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찬스 2

멀고느린구름 2013. 7. 20. 09:54




  그남은 어두워진 풍경과 자기 옆의 빈 자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6번 좌석을 살핀다. 그녀가 없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다른 좌석도 살펴본다. 잠을 자고 있지 않은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이 날아든다. 그녀는 없다. 다시 자리에 앉는다. 11년이다. 아무리 서로 친한 사이였다고 해도 11년이란 세월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딱히 묻고 싶은 이야기도, 서로 반드시 나눠야할 이야기도 사실 없다. 그때 알고 지내던 그녀 쪽의 사람들의 안부라도 물을까 싶지만, 그들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실례일 것이다. 영화는 삶을 모방하고 삶은 영화를 모방한다. 그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찾아내어 말을 건다면 후자쪽이 될 것이다. 어디선가 보지 않은 삶이란 없다. 서른이 지난 이후 삶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다. 인간의 삶이 지나치게 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래전 스승의 부음을 전해듣고 귀향하는 그남의 입장에서는 조금 결례인 생각이다. 누군가는 어째서 초여름에 생을 마감하지 않으면 않은 것일까. 세상이 열에너지에 의해 팽창하고 성장하는 시기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들어가는 일을 겪어야 하다니. 햇볕이 내리쬐는 지상을 두고 캄캄한 흙 속으로 스러져야 하다니. 인생은 언젠가 끝난다는 말은 위선적이다. 그저 인생은 끝난다. ‘언젠가’라는 말이 가진 거대한 희망 속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깃들어 있다. 


   승무원이 음료를 실은 카트를 밀고 지난다. 멈춰 세운다. 맥주와 홍차 중 고민하다 홍차를 고른다. 그남의 첫 번째 여자가 좋아하던 홍차 음료다. 훗날 헤어진 첫 여자와 다시 만나 얘기를 했을 때 그녀는 자신은 그런 홍차 음료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여자의 홍차 음료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나에 대해 모든 것을 기억할까. 오래된 친구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듯이 나의 예전 전화번호도 잊혀지고 만다. 유년 시절 내가 어떤 장난감을 좋아했고, 어떤 과자를 즐겨 구입했는지 나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추억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추억에 사로잡히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남은 자신이 떠올린 문장을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6호실에 앉은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열차는 마음의 소란만을 싣고 달리고 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는다. 


   그남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난다. 안내 방송 소리 때문이다. 열차는 곧 동대구역에 도착한다. 그남은 시계를 본다. 장례식은 내일이다. 그남은 표를 꺼내어 목적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부산역. 좌석 앞 그물에 넣어두었던 책을 꺼내 가방에 넣는다. 열차가 조금씩 속력을 줄인다. 동대구역 플랫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남은 자리에 일어난다. 6번 좌석을 흘끔 쳐다본다. 없다. 그대로 그남은 열차에서 내린다. 가슴에 묘한 통증이 인다. 아마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결혼 속으로 들어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세계는 전혀 별개의 두 세계였으므로. 출구 표시를 따라 계단을 오른다. 버스로 갈아타고 부산까지 갈 생각이었다. 동대구역에 내린 것은 두 번째다. 스물 다섯 살 무렵 그남은 모든 열차역에 내려보겠다는 기묘한 도전에 나선 일이 있다. 결국 경제적 사정 문제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주요역에는 한 번씩 다 내려본 것이다. 역문을 나서자 밤인데도 남도의 열기가 훅 끼쳐온다. 목이 탄다. 그남은 가까이 보이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산다. 


   그녀는 편의점 유리문 안 쪽에 선명하게 보이는 그남을 발견하고 놀란다. 어째서. 그녀는 걸음을 돌려 그남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곳에 몸을 숨긴다. 어째서. 전화벨이 울린다. 약혼자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째서.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남도의 열기 탓이라고 여긴다. 그녀는 스토커처럼 그남이 스포츠맛 폴라포를 입에 물고 편의점을 나서는 것을 지켜본다. 그남은 폴라포를 입에 문 채로 동대구 역사를 바라본다. 무언가 놓고 온 것이라도 있는 듯이. 다시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다짐한 그녀다. 인연이라는 문학적인 단어는 적어도 그녀에게는 ‘저주’와 동의어였다. 몇 번이나 그 단어에 현혹되어 어둠 속으로 떨어졌던가. 그녀는 손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도시의 불빛이 얼굴을 정확히 반으로 빗가르며 그늘을 만들고 있다. 사람은 그저 이 빗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것뿐이야. 그녀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10여 년 전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손가락의 커플링을 확인한다. 약혼자에게 전화를 걸어 부산역에 무사히 당도했음을  알린다. 저편의 약혼자는 같이 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좋은 남자다. 결혼은 착한 남자랑 해야한다고 친구들은 말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착한 남자와 결혼했다. 물론 지금은 착하지만은 않는 남자들과 살고 있다. 전화 통화를 마친 뒤 그녀는 역 앞 광장 쪽을 샅샅이 살핀다. 그남은 없다. 그제서야 편의점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포도맛 폴라포를 입에 물고 편의점을 나선다. 가장 먼저 도착한 택시에 올라탄다. 


어데 가십니꺼?

수성못이요. 




2013. 7.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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