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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육 혁명! 한국도 대단해?



교육계에 부는 핀란드 교육의 바람이 거세다. 서점가의 교육학 코너에는 핀란드 교육의 비결, 비법, 비밀 등등의 제목은 물론 핀란드 교육'혁명'이라는 책까지 등장했다. 요즘의 이러한 핀란드 교육 열풍은 역시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적 교육평가 PISA의 결과 덕분일 것이다. PISA를 통한 평가 결과 핀란드는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가히 교육 선진국, 교육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최북단에 위치한 파주에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나 같은 대안학교 교사에게도 직간접적으로 그 열기가 느껴질 정도이니, 그 위세가 실감이 간다. 특히, 일본은 PISA에서 내리 저조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국가 전체가 나서서 핀란드를 벤치 마킹하려는 기세다. 핀란드 교육에 대해 분석한 많은 책들이 대체로 일본을 거쳐 재번역되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에 비하면 우리 교육계는 다소 여유로운 표정이다. 왜냐하면 '어처구니 없게도' 핀란드에 이어 한국이 PISA 평가 2위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PISA가 분석한 여러 지표, 읽기 능력, 수학 능력, 위기 대처 능력 및 여러가지 교육환경에 관한 평가들을 보면 한국은 핀란드와 어깨를 견주는 교육 선진국이자, 교육 강국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바마도 한국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것일까? 물론, 나는 백악관이 허락한다면 오바마를 만나서 간절히 그러지 말라고 충고할 생각이다. 한국의 위기를 인류의 위기로 확대시켜서는 안 되지 않나. 


실제로 몇몇 고위 교육 관계자들은 PISA의 결과에 만족하고 으시대기까지 하는 모양이다. 발빠르게 한국 교육의 우수성을 알리는 보수적인 교육학 서적들의 발간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장의 교사들이나, 학부모들, 특히 학생들은 이러한 결과 앞에 뭔가 뜨끔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학생들은 뜨끔 정도가 아니라 멘붕에 빠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이런 방식을 몇 백년 동안 계속 해야하는 거야?! 끄악! 이라고 하면서. 


단 하나의 지표로 우리는 PISA의 자랑스런 결과를 처참한 비극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 바로 OECD 회원국 중 청소년 자살률 1위. 그리고 이어지는 자랑스런 지표들. 국민 행복지수 최저 그룹. 높은 실업률. 사회안전망 등 복지 수준 최저그룹. 과외 학업 시간 핀란드의 2.8배. 


PISA가 미처 평가하지 못한 한국의 지표들을 살펴보면 1위인 핀란드의 아이들은 적은 학업시간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능동적으로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하면서도 다양한 분야에 취업하고, 좋은 학업 성과도 동시에 내고 있다. 반면, 한국의 아이들은 살인적인 학업시간을 통해 완벽하게 수동적으로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 넣고 있으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을 기도하거나, 자살을 준비하고 있고, 그토록 청년 시절을 다 바쳐 공부를 했음에도 적정한 직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교육은 한 마디로 모래 위에 성을 쌓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적으로 학생들의 비인권적인 희생 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육은 PISA 2위라는 수치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된다



PISA라는 국제 교육 평가는 기존의 평가방식이 단지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 하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평가방식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학생의 지적수준이 아니라, 전반적인 삶에 대한 능동성과 삶의 여러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지혜를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PISA의 근본적인 취지를 고려할 때, 한국의 교육은 겸손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들 하지만 정작 정말 수사적인 의미로라도 백 년 앞을 내다보는 교육 입안자는 보이지 않는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그 결과가 상당히 먼 미래에 나타나는 행위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교육에까지 파고들어 지금 시장의 요구를 교육에 반영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사회의 요구를 교육에 반영하면 교육은 필시 망하고 만다. 교육은 반드시 미래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이 지금 사회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하면 사회는 끝없는 순환의 굴레에 빠지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교육이 만연한 국가는 세계 무대에서 철저히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교육을 과거 낙후했던 한국의 당면 상황에 두지 않고, 끊임없이 좀 더 나은 선진국의 교육 방식을 끝없이 채택하고자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교육은 유럽의 방식 일부(국민보통교육)와 미국의 방식(무한경쟁)을 참으로 진득하게 추종했고, 지난 20세기를 통해서는 그 달콤한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고, 달라진 국제 사회의 환경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더 이상 한 분야의 전문가나, 한 사람의 천재가 국가 전체의 경제를 리드해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지식은 웹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었고, 더 이상 그것이 머릿속에 얼마나 저장되어 있는가가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인간의 머리보다 2TB의 휴대용 외장하드가 더 많은 정보를 더 정확히 암기할 수 있게 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우리 다음 세대는 거기서 더 인간의 기억용량이 필요없는 세상에 살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제 미래의 인재들에게 정보를 가공하고, 변화시켜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제3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더 이상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구멍가게 하나도 경영해낼 수 없다. A라는 정보와 B라는 정보를  유기적으로 링크시킬 수 있어야 하며, 한국이라는 좁은 무대를 생각했던 사고에서 벗어나 '지구'라고 하는 보다 큰 단위에서 사고하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교육은 그러한 미래에 어울리는 학생들을 과연 키워가고 있는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일찌기 한국에서도 '대안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미래적인 교육'이 모색되었고, 오늘날에는 10여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제법 완성도 있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대안교육이 10여년의 여행 끝에 도착한 지점이 '핀란드 교육'으로 대표되는 북유럽 교육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안교육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으며 일률적으로 모든 대안교육이 북유럽 교육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허나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파주자유학교(이하 파자)의 교육 시스템은 분명 '핀란드 교육'이 다다른 지점과 상당부분 유사성을 띤다는 것이다. 세계 최초의 대안교육기관이라고 일컬어지는 영국의 섬머힐을 모티브로 아메리카원주민(북미인디언)의 세계관을 접목해 11년전 문을 연 파자의 교육시스템은 2013년 현재 분명히 '핀란드 교육'에 가까워져 있다. 



- 2부에 계속 -



2013. 3. 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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