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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립, 그리고 학습의 자립  



   핀란드 교육의 가장 명백한 특징은 학습에 있어서의 자립이다. 아이들은 일찍부터 자기 스스로 자기가 배울 것을 선택하고 학습해 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보여지는 영재들을 위한 자기 주도학습과는 달리, 학업 성과가 뛰어나건 뛰어나지 않건 핀란드의 아이들에게는 학습은 곧 자기의 몫이다. 


  하지만 뭐든 자기 몫으로 맡겨만 둔다면 공부를 알아서 할 학생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핀란드 교육도 오래전에 봉착한 문제이다. 자유교육을 표방하며 의욕적으로 나섰던 국가들도 결국 이 문제에 봉착한 후 다시 일률적이고 강압적인 평가 시스템이나 교육방법을 적용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핀란드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핀란드는 좀 더 개인의 자유도를 높여주고 개개인의 아이들에게 교사가 개인 교수처럼 일대일로 코칭에 나섰다. 핀란드의 교육 입안자들은 생각했다. 어차피 학습이란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거기에는 물론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잠재력의 차이도 뚜렷하다. 이미 타고난 학습 역량을 지니고 있고 자기에게 잘 맞는 학습법을 찾아낸 아이는 구태여 잘못된 방식으로 교사가 개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교사의 역량은 아직까지 자신의 장점이나 좋은 학습법을 찾지 못한 아이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 핀란드는 그렇게 판단했고, 그 판단의 결과로 오늘날의 교육강국 핀란드가 태어났다. 


  핀란드는 정확하게 한국과 정반대의 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국민보통교육의 기치를 올리고, 고교 평준화를 확대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교육은 형편이 어렵고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약자를 위한 교육에 그 중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덕분에 수많은 개천의 용들이 탄생할 수 있었고, 그 원동력으로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허나 기적이 이뤄진 다음부터는 교육이 달라졌다. 강자 중심으로 가기 시작했고, 경제적 여건에 따른 기회의 불평등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했다. 교육 정책은 점점 더 약자가 아닌 강자에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공교육은 학원에 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맞추어지지 않았고, 학원에서 이미 진도를 빼고 온 아이들의 수준에 맞추어 점점 그 수준이 높아져만 갔다. 덕분에 낙오된 아이들은 도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생겨났고, 낙오된 아이들에 대한 인간적인 진로 지도는 어느 날부터 생략되었다. 학교마다 경쟁적으로 좀 더 잘하는 아이들에 전력 투구해서 좀 더 많은 아이를 수도권 대학에 보내려고 혈투를 벌였다. 수능시험은 과도한 학습시간으로 머리에 든 게 많아진 아이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난이도를 조정했고, 낙오된 아이들은 점점 더 소외되어 갔다. 이것은 비단 교육의 문제뿐 아니라 점차 사회 전반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으며, 10년, 20년 이런 방식의 교육이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부의 이동이 없는 심각한 보수 사회에 접어들고 말 것이며, 사회의 생동감은 더욱 떨어지고, 경제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고 말 것이다. 소수의 기업, 소수의 영재들이 자국민을 식민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많은 미래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최근의 기사는 그와 더불어 '마마 대학생'의 출현을 우려하고 있다. '마마 보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요소였다.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세월만 지났으니 '마마 대학생'의 탄생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어서 '마마 직장인', '마마 CEO'가 탄생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국 사회는 심각한 자립성의 결여, 창조적 에너지의 소진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정치가 시민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지난 대선에 온 힘을 쏟았지만, 승리한 쪽도 패배한 쪽도 이제는 깨달았을 것이다. 대통령은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우리가 살고 있던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이미 지난 대선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들을 잊고 다시 한 번 불가능한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닐까. 달콤한 힐링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변혁을 위한 도전에 나서야 할 것이다.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종교와 교육이다. 종교야 개인의 선택이기에 우리가 제도로서 강요할 수 없다. 하지만 교육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도이다. 교육 제도를 보면 그 사회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아이들이 겪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미래다. 그것을 망각한 채 지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 시기를 견디면 꽃이 필 거라고 허황된 꿈을 심어주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의 삶이 곧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들과 청소년이 행복하고, 꿈에 차 있는 사회는 그 사회 전반 역시 행복하고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증거를 핀란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핀란드가 아이들의 학업을 전적으로 자기 주도에 맡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 사회적 여건에 중요한 키포인트가 있다. 핀란드 사회의 우수한 복지제도가 여러 번의 실패 후에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여건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마음껏 자기의 의지에 따라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 자기의 실패에서 새로운 학습 요소를 찾아 배워가며 재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원천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한 번 크게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자산가의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에는 재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젊은이들은 안전한 길을 가려하고, 사회 전체가 합의한 방식으로만 학습에 임한다. 그런 사회에서 창조성은 정말 극히 제한된 소수의 천재에게서 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교육제도가 아니다. 한국의 교육이 노리고 있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로또 교육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엄마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쪽 어른을 양산하고, 소수의 인재에게 경제 주도를 맡긴다. 이런 방식은 1등 시민과 2등 시민을 구분해서 사회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자의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제강점기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우리나라 교육 입안자들의 DNA 속에는 아직도 식민주의가 남아 있는 것일까. 교육 입안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놓고 에드워드 사이드 경의 특강이라도 들어야 할 판이다. 


  정치 변혁과 사회 변혁 뒤, 그러니까 모든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진 복지사회를 기다린 다음 교육 변혁을 말하기에는 너무 늦다. 여러 차례 말했듯이 교육제도가 곧 그 사회의 미래다. 먼저 우리의 교육 철학을 수정해야 한다. 교육의 포커스를 앞서가는 영재에서 뒤쳐지는 아이들 쪽으로 수정해야 한다. 스타강사 열풍으로 대변되는  강사 1인 주도의 주입식 교육 방식에서, 일대일 멘토로서 코칭 위주로 가는 자기주도적 교육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가정의 자립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학교 생활의 자립, 학습의 자립으로부터 가정의 변화도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과의 무한 경쟁에서 자기 자신과의 경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한국의 대안교육은 10여년 전부터 우리 교육의 이러한 문제점을 직시하고 교육에 있어서의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그리고 낙후된 사회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분명 유의미한 성과들을 내고 있다. 만약, 우리 사회가 핀란드 복지 시스템의 절반 수준만 되었어도 대안교육 10년의 성과는 더욱 놀랍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 3부에 계속 



2013. 3.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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