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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태어났을 때도 지금처럼 겨울이 다가오려는 때였겠지? 엄마와 아빠는 가난했고 언니는 아직 어렸었어. 아빠는 배를 타러 나갔다가 가끔씩만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느날에는 돌아와보니 엄마의 배가 불러 있는 거야. 아직 2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했던 두 사람은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나봐. 아빠는 술을 먹고 엄마를 두들겨 팼고, 그 와중에도 엄마는 배로 날아오는 발길질만은 피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대. 임신 중절 약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아빠를 피해 외할머니 집으로 도망갔다가 머리채가 잡혀서 끌려나오기도 했다고 해. 어느 날은 외할머니가 사가지고 온 델몬트 주스에 약을 몰래 타넣기도 했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엄마는 급히 화장실로 가서 다 토해버렸어. 아빠가 배를 타러 나간 사이에 간신히 나는 태어났어. 하지만 엄마는 아빠가 돌아오면 나를 죽일 것 같았대. 그래서 외할머니에게 맡겨놓고 아빠에게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했어. 한 살의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어. 태어나서 엄마의 얼굴을 본 것은 불과 몇 시간 뿐이었겠지. 그렇게 1년이 지난 다음에야 유전자 조사라는 것을 받아서 친자임이 확인 되었고, 소리없이 죽었었던 나는 엄마와 아빠의 딸로 다시 살아났다는 거야.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보다 아빠가 좋았어. 아빠의 얼굴, 아빠의 목소리, 아빠의 웃음, 아빠의 장난, 심지어 아빠의 우울함까지도 사랑했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엄마가 나를 목숨 걸고 지키려 했다는 것은 전혀 알 턱이 없었지. 아빠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었어. 하지만 아빠가 좋아한 것은 언니였어. 언니는 명석했고 쾌활했고 부정할 수 없이 예뻤어. 온 동네 남자애들이 집 앞을 서성거렸어. 그럴 수록 아빠는 언니를 보호하고 언니의 꿈을 지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았지. 아빠는 심지어 엄마보다도 언니를 사랑했어. 언니를 질투했어. 증오했어. 죽이고 싶다고 매일매일 생각했어...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때 초겨울. 아빠가 엄마를 심하게 때린 날이 있었어. 경찰차와 엠뷸런스가 출통했고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구경을 왔었지. 다락방에서 내려와 내가 안방에서 본 것은 바닥에 묻은 피를 닦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었어. 침착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하얀 걸레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어. 난장판이 된 안방을 청소하고 언니는 내 도시락통을 싸준 뒤 걱정말고 학교에 다녀오라고 했어. 감동적이었지만 그럴 때일수록 내색하고 싶지 않았어. 언니에게 이게 다 니가 딸 노릇을 제대로 못하니까 그런 거야 라고 쏘아 붙였어. 사실은 나에게 하고픈 말이었어. 언니는 피식 웃으며 어서 학교에 가라고 했어. 자기는 엄마 병원에 아무래도 따라가봐야겠다며 학교 마치면 병원으로 오라는 거였어. 난 속으로 엄마 병원보다는 아빠 경찰서를 먼저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난 아빠가 어디 경찰서로 끌려갔는지도 몰랐어. 아무튼 언니랑 더 단 둘이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학교로 와버렸지. 도망치듯이.
학교가 파하고 병원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피를 닦고 있던 언니의 모습이 새삼 떠오르는 거야. 엄마가 입원했다는 병원으로 방향을 바꿨어. 엄마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잠들어 있고, 외할머니가 곁에 앉아 계셨어. 외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품속에 안아주셨어. 그 품속이 어찌나 따뜻했는지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었어. 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깨어났어. 엄마는 꿈속에서 아직도 어린 아기인 내가 눈 속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어. 품에 안으려고 다가가니까 하얀 고양이로 변해서 달아났다는 거야. 외할머니는 복권을 사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어. 우리는 함께 웃었고 함께 귤을 까먹었어. 엄마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것은 처음이었어. 엄마가 가여웠어. 그러고 있는데 간호사가 들어와서 내게 전화가 왔다고 했어. 프론트로 가서 전화를 받았어. 아빠였어. 난 귀를 의심했어. 내가 미쳤나보다 했어. 이 모든 게 꿈인가보다 했어. 언니가 죽었대.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아빠가 무너지는 목소리로 말했어. 엄마와 아빠는 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이혼했고 합의 하에 나는 아빠와 함께 살게 되었어. 엄마는 그 뒤로 외할머니와 함께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고 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엄마를 볼 수 없었어.
아빠는 죽은 언니 대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어. 내가 그토록 원했던 꿈이 이루어진 거였지. 하지만 아빠가 사랑한 것은 영영 언니였어. 취향이 달랐던 언니의 옷을 물려 입고, 언니가 잘하던 과목의 과외 수업을 받고, 언니처럼 피아노를 배웠고, 언니와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다녔지만 도무지 언니처럼은 될 수 없었어. 성적은 쉽게 오르지 않았고, 내게 음악적 재능은 없었어. 남방계의 아빠를 닮아 아름다웠던 언니와 달리 난 북방계의 엄마 얼굴을 그대로 닮았었어. 점점 아빠의 기대를 견딜 수가 없었어. 끔찍했어 죽은 언니의 부활을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 온 집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어.
보란듯이 4년제 대학에도 나는 들어가지 못했어. 언니라면 손쉽게 수도권의 유력대학에 입학했을 거야. 아빠는 일부러 내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허나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어. 나는 아빠 몰래 서울에 있는 관광가이드 양성 전문대학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한 뒤 편지 한 장만 남겨놓고 상경했어. 언제나 숨막히는 세상을 인생을 떠나고 싶었어. 언니는 그것마저 나보다 앞서 해버렸어. 정말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언니지. 가끔 과거를 거슬러 가보곤 해. 기억과 기억이 만든 아슬아슬한 사다리를 타고 언니가 떨어져내린 그 옛집의 옥상에까지 올라가보는 거야. 언니에게 말을 걸어. 거기서 뭐해. 왜 그랬어. 라고.
비행기를 타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면. 외국인들 속에 섞이면. 나는 다른 내가 될줄만 알았어. 니가 하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는 내가 아니고, 한국인이 아니고 또 사람도 아니고 그저 검은 우주 어딘가에 있는 창백한 푸른 점, 그곳에 잠시 머물다가는 하나의 생명체로 여겨져서 참 좋았다. 끝없이 팽창한다는 우주, 137억년의 시간, 태양계의 9개 행성과 60여개의 달, 그런 것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삶도 죽음도 보잘 것 없었어.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웅크리고 등을 돌린 아빠가 내 옆에 벌거벗고 있을 뿐이었지. 사람들은 어쩌면 다 하나같이 가여울까...
그만 만나자.”
절망에 빠진 얼굴을 한 남자친구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거리가 온통 새하얬다. 발자국이 나지 않은 곳으로만 부러 걸었다. 뽀드득 뽀드득대는 소리가 위로의 말로 들렸다. 멀리서 구세군의 종소리가 투명하게 울려퍼졌다. 엄마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간결한 메시지였다.
‘유기묘 입양 결심. 우리 딸, 이쁜 이름 좀 없나?’
눈발 사이로 도시의 밤을 비추는 불빛들이 보였다.
2012. 12.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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