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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고양이가 있었다 6

멀고느린구름 2012. 12. 9. 16:39





종로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길을 걸었다. 종묘에서 안국역까지. 인사동길을 가로질렀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붐볐다. 루체른에서의 나와 그를 닮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남극탐사대원처럼 패딩점퍼에 방한 마스크와 두터운 목도리까지 여러겹한 사람은 남국에서 왔을 것이었다. 한편 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이쯤이야 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구도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국인의 모습이 이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지도 위에 있는 검은 점 어디에서나 다른 검은 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여행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이국의 여행자가 되어 고국에 대한 향수병을 느낀 뒤에야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걔 중에는 타국으로 둥지를 옮기는 경우도 많았다. 


가이드는 여행자이면서도 영원히 여행자가 될 수 없었다. 돌아온 뒤의 삶을 위해서만 떠났다. 떠나야지만 돌아온 뒤의 삶이 보장되었다. 통장에 돈이 입금되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3류 여행사의 월급은 참담했다. 88만원 세대라고 해도 매월 돈이 보장이 된다면 불만이 없을 것이다. 여행객이 없을 때는 집에서 칩거하며 생활비를 보존해야했다. 남자친구가 해외 세미나를 가거나 알 수 없는 일로 장기간 지방 체류를 할 때에는 주말마다 편의점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11월의 칼바람을 맞고 걸으며 이런 잡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싫었다. 죽고 싶은 날이 어쩌면 살고 싶은 날보다 많았다. 그럼에도 살았다. 웹서핑을 하다 툭툭 건져올리게 되는 반짝이는 인디음악과 남루한 삶을 녹여내는 한 잔의 원두 커피, 그리고 남자친구의 우주 이야기가 나를 살게 했다.  엄마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삶의 이유에 엄마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사람들은 이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내게 가족이란 말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같았다. 시간은 비가역적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이에 우주는 팽창을 멈추고 처음의 우주로 되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기를 바랐다. 우주가 무한히 팽창한다면 사람은 얼마나 더 홀로 되겠는가. 섬들은 얼마나 더 많아지려나.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어 바빠.”

“저녁엔?”

“6시 이후.”

“종로에 있어. 종로로 올래? 오랜만에 영화도 보구.”

“피곤해. 집으로 갈게.”

“아니 집 말고, 밖에서 보자.”

“귀찮아.”

“그럼 다음에 봐.”

“갈게. 추우니까 영풍에 있어.”


 전화를 끊고 영풍문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풍문고 지하코너에서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목도리를 하나 샀다. 네이비색 민무늬 목도리였다. 노랑색도 몇 번 들었다가 놓았다. 한강 작가의 책을 한 권 샀다. <바람이 분다, 가라>. 지하 카페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플랑크 시간과 달의 뒷면. 남자친구가 전하던 말들이 갈피 갈피에 놓여 있었다. 47페이지의 ‘여수의 사랑’이 387페이지의 우주로 확장되어 있었다. 작가 속에서 일어난 인플레이션이었다. 우주처럼 사람도 탄생과 플랑크 시간과 인플레이션과 빅뱅을 겪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멸한다. 우주도 결코 유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여자의 위대한 직감이었다. 


“시간이 무한히 느려지는 이런 밤에, 기억들은 스스로 살아나 움직인다. 부서진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아간다.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5. 검은 하늘의 패러독스, 175쪽까지 읽었을 때 남자친구에게 밖으로 나오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책을 덮고 일어나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서있는 반디앤루니스로 향했다. 남자친구는 늘 이런 식이었기에 그가 약속장소로 오지 않은 것이 특별히 서운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서운하지 않다는 그 감각은 쓸쓸했다. 남자친구는 보자마자 추운 날 따뜻한 집을 두고 왜 밖에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핀잔을 늘어놓았다. 웃고 말았다. 남자친구는 내내 못마땅해했다. 저녁은 김밥천국에서 해결했고, 내게 메뉴판을 먼저 건내지도 않았다. 메뉴판을 먼저 건내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언제나 자기가 기본적인 매너라고 정해놓은 것들은 명확히 지키던 사람이었으니까. 어둠이 덮이자 추위가 더해졌다. 온 몸이 떨릴만큼이었다. 자꾸만 집으로 가자는 남자친구를 이끌고 청계천변에 있는 자그만 카페로 갔다. 남자친구의 입이 오리만해졌다. 칭얼거리는 남자는 귀여웠다. 허나 그 귀여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여자는 쓸쓸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우주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쓸쓸함이었다. 성경은 아담에서 이브가 나왔다고 적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구전에서는 소피아라는 여성이 아담을 낳았다고 했다. 먼저 태어난 것은 분명 여성 쪽이었을 것이다. 


 남자친구는 카페에 들어와서도 성화였다. 어서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뒤의 말은 생략되어 있었다. 관계를 맺고 싶어서 들뜬 것이 틀림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가 눈 온다라고 외쳤다. 남자친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간이 느려졌다. 하고 싶었던 말이 눈녹듯 흘러나왔다. 




2012. 12.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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