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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달빛 밤에

멀고느린구름 2013. 1. 28. 22:32





달빛 밤에




물은 마법사야.


왜냐고? 왜냐면 물은 마법을 쓰거든. 자 저 물결 소리를 잘 들어봐. 밤의 기운은 물의 마법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 쪼르르 쪼르르... 저 소리가 나에게는 쓰르르 쓰르르 귀뚜라미 소리가 같이 쓸쓸하게 들려. 그래, 녀석 눈치 챘구나. 물의 마법은 쓸쓸함이야. 눈가에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하지만 울지 마. 이건 그냥 마법에 걸린 거뿐이니까. 세상에는 어쩌면 즐거운 일뿐인데, 우리만 어쩌다 마법에 걸린 거뿐이니까. 그래, 너와 나 우리 둘만 말이야. 녀석 사내 녀석이 끙끙거리긴. 어 근데 너 사내 녀석 맞아?


왕왕!!


어 그래 그래 알겠다. 사내 맞구나. 근데 니 엄만 도대체 어디 간 거니? 니 엄마도 우리처럼 마법에 걸린 걸까? 이 마법을 푸는 약은 왕자님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떡하지? 야, 달빛이 참 밝다.


나는 다리 난간 밑에 비밀스레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았다. 반대쪽 난간 밑 역시 보았다. 물에 홀려 혹시 흰둥이의 엄마가 뛰어내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다리 밑으로는 달빛만 풀려 흐르고 있었다. 흰둥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뒤꿈치를 바짝 따라왔다. 저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면 힘도 없는 게 왕왕하고 짖어대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버려진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흰둥이는 뱀처럼 스르륵 기어와 내 무릎 위에 똬리를 틀었다. 흰둥이의 눈 속에 물에 풀린 달이 있었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니었어. 이러려고 너를 쓰다듬은 것도 아니야. 흰둥아, 도대체 엄마는 널 두고 어디 간 거니?

  

요즘 들어 야행성이 된지라 밤에 잠이 오질 않았다. 어떻게 시간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밤이 되면 동이 트듯 정신이 깨어났다. 어쩌면 그건 그녀에게 ‘사랑하는 것 같아’ 라고 멋없는 고백을 한 뒷날부터의 일인지도 몰랐다. 늘 그랬듯이. 사실은 이제 겨우 이주일 째지만. 밤 10시에 집을 나섰다. 누구에게나 함박웃음을 선사하는 싱글벙글 아저씨의 싱글벙글마트에서, 실론티 한 캔을 샀다. 그리고 곧장 제기천행이었다. 제기천의 밤은 아름다웠다. 밤은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다른 것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두 다 검은 아름다움의 물감이 되었다. 제기천을 산책하는 일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유키구라모토를 듣는 것 같은 우울함과 편안함을 선사했다. 우울함이 편안함이 되다니 틀림없이 난 우울증이었다. 


 ‘붉은 홍차의 꿈’ 이라는 실론티의 광고 카피는 밤이면 붉게 점등되는 제기천의 가로등과 어울렸다. 난 늘 실론티만 마셨다. 실론티, 티, 복숭아티, 데지와. 하여간 종류도 많은데, 왜 하필 실론티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런 걸 일일이 귀찮게 물어볼 사람도 없겠지만, 누가 정말 궁금해 죽겠다고 한다면. 광고 카피가 멋져서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하지만 미연방수사국의 멀더씨가 증언했듯, 진실은 언제나 멀리 있었다. 내가 유독 실론티만 마시는 까닭은, 내 대학 첫사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음료수였기 때문이었다. 아, 너무 싱거운 얘기였다. 


나는 늘 제기천을 걸으며 소설을 쓰듯 생각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나는 무언가 그립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무엇이 무엇인지에 가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냥 노래나 부르자고 나는 마음을 바꿨다.’ 이렇게 독백을 하고는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주로 물망에 오르는 노래들은 전람회나 토이의 노래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전람회의 ‘첫사랑’ 은 나의 모든 감정의 코드와 일치하는 놀라운 노래였다. 


 더 높게 보이고 더 크게 보였지

 내가 아닌 마음에 난 눈물을 흘리고

 잡을 순 없었어 가까이 있지만

 숨겨진 네 진실은 난 부를 순 없었지...


세상에 그 누구도 숨겨진 진실을 부를 순 없었다. 그것은 신을 몸에 담는 샤먼도 마찬가지. 모두가 이 밤의 제기천 마냥 검게 얼굴을 가리고, 붉은 꿈을 꾸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냇가를 따라 걸었다. 물은 계속 주문을 외웠다. 달의 인력도 내 마음을 끌었다. 내 마음은 더 이상 내 마음이 아닌 것처럼, 달과 물을 따라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종종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더벅머리 아저씨가 물 만난 고기떼처럼 신나게 쉭쉭 지나갔다.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를 데리고 조깅을 하는 남자도 있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에 신경 쓰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누군가 신경 쓸 거라 여기고 고음에서는 자진해서 슬며시 볼륨을 줄였다. 


 볼 수는 없었지 마음 깊은 곳까진

 언제나 한 발 멀리서 그냥 웃기만 했어

 추운 날이 가면 알지도 모르지

 겨울밤의 꿈처럼 어렴풋하겠지만 

 잊을 순 없겠지 낯익은 노래처럼 

 버려진 수첩 속에 넌 웃고 있겠지 우우 우우우...


어때, 이 노래 좋지? 야, 부끄러워 말고 좋음 왕왕 짖어봐. 계속 그렇게 울상 짓지 말고. 그래 내가 네 심정은 이해하는데, 나라고 그냥 웃어줄 밖에 깊은 속은 어쩌겠니. 어, 이 대사하고 보니 방금 노래 가사다. 아, 오랜만에 명언하나 남기나 했는데 안타깝다 안타까워. 나는 언제쯤 호랭이 가죽 같은 명언 한 번 남겨볼까.


춥니? 이리와 이리와. 에유 쬐그만 녀석이 한 여름에 오들오들 떨고. 바보 같이 엄마가 널 여기다 묶어 놓는 거 보고 눈치 채고 엄마 손가락이라도 콱 물었어야지. 하긴 그 아줌마 좀 힘세게 생겼더라. 야, 내가 유일한 목격자라고 널 양육해야할 의무는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자취생이라 널 집에서 못 키운다구. 참, 네가 자취생이 뭔지 알 턱이 없지. 에... 자취생은... 나처럼 오밤중에 일없이 쏘다니는 인간들이야. 이제 알겠지?


우리 벌써 한 시간 째다. 아무래도 네 엄마 안 올라나봐. 사내놈이 낑낑거리지 말라니까안. 아니다 아니다 나도 사내놈이 그 말 때문에 당하고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역시 사람은 당한 대로 자라는 지도 모르겠어. 배신당한 사람은 배신하고, 맞아본 사람은 때리지. 보고 겪은 대로 자란다는 걸 다들 모르나봐. 아니 알면서도 후회할 행동 후회할 말들을 하는 것이겠지. 너희들 멍멍이들도 그런 말들을 하니?


흰둥아, 물의 마법이 점점 세지는 것 같지 않아? 'fly me to the moon' 이라는 유명한 재즈곡이 있는데, 지금 내 심정이 딱 그 노래 같애. 어쩌면  네 엄마는 너를 여기 묶어 놓고 저 달빛 속으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르겠어. 형체도 흔적도 없이. 무거운 쓸쓸함만 여기 부려놓고 새털처럼 날아간 거야. 앗! 봐, 여기 새털이 있잖아. 아 이건 비둘기 털이구나. 혹시 네 엄마는 비둘기로 변신한 거 아닐까? 그래, 재미없는 농담은 그만 두자. 이거? 흠 너 주긴 좀 아까운데...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야. 자 쭉 마셔. 실론티라는 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수야. 붉은 홍차의 꿈이라는 커피가 너무 멋지지 않니? 


하얗고 비쩍 마른 잡종 강아지를 안고 있는 붉은 스웨터 차림의 아주머니를 본 것은, 작사 작곡해서 부르고 있던 노래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두운 다리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아 애틋하게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창작 노래의 클라이막스를 들켜버린 민망함이 앞섰다. 나는 노래를 클라이막스서 뚝 잘라 먹고, 평범한 산보객인 척 유유히 다리를 건너는 것이었다. 허나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신나게 노래하다 뚝 끊고, 표정 싹 바꾸며 걸어가는 사람이 되려 정신이상자 마냥 느껴졌을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최고조의 즐거움은 최고조의 쓸쓸함과 맞닿아 있는 지도 몰랐다. 사랑이란 게 그렇듯이. 


들어봐. 흰둥아. 뭐? 왜 흰둥이라고 자꾸 부르냐고? 아, 그건 예전에 내가 기르던 강아지 이름이 흰둥이여서야. 너랑 좀 닮았어. 왜? 이름이 너무 촌스럽니? 미안 미안 내 센스의 한계란다. 이담에 좋은 주인 만나서 멋진 이름을 선사 받으렴. 세바스찬 같은 거로 말이야. 하하 이것도 촌스럽긴 마찬가지구나. 아무튼 말야. 버림 받는 건 참 힘든데, 이별에 면역은 없어. 되려 많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 이별이 아픈 거 같애. 이별을 하며 이전의 이별과 버림 받은 기억이 와락 오버랩 되거든. 아, 오버랩은 겹친다는 뜻이야. 그것처럼 사랑해 본 사람이 사랑의 기쁨을 잘 느껴. 근데 그만큼 사랑의 아픔에도 민감하게 되는 것 같아. 넌 그래도 다행인 케이스야. 이번이 첫 이별이잖아. 첫 고통이잖아. 맞지? 너 보니까 태어 난지 1년도 안됐겠다. 이구 불쌍한 것. 사실은 나도 엄마한테 버림 받아봐서, 네 마음 잘 이해가 돼. 나 중학교 때 엄마가 출가하셨거든. 우리 집은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어. 제대로 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어. 근데 이제 되뇌어 보니 가장 뒤죽박죽인 건 바로 나인 것 같아. 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야. 어쩜, 지금 갑자기 싸해져서 네가 울든 말든 뻥 차버리고 도망갈지도 몰라. 


  왕!


깜짝이야 너 어린 게 되게 똑똑하구나. 사람 말도 잘 알아듣고 말이야. 나는 안 그럴 사람 같지? 그치? 근데 세상에 안 그럴 것 같은 건 없어. 누구나 다 자기도 모르는 비밀을 가지고 있고, 그 비밀은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정말 비밀이야. 나의 비밀을 살짝 볼래? 저리 꺼져! 이 똥개새끼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리 반대편으로 차갑게 걷는다. 개가 죽어라 짖어댄다. 작은 돌을 집어 빗맞게 던진다. 개는 약간 움찔하더니, 더욱 더 소리 높여 발광한 듯 짖는다. 다시 개에게로 다가간다-


  미안 미안. 장난 그냥 쳐 본거야. 장난 한 번 살벌하게 하지? 자 이리와.


-강아지를 품에 안는다-


에고 우리 흰둥이 우는 거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네. 울보 흰둥이. 끙끙거리지 말래두. 아니다 그냥 계속 끙끙거려. 내가 안아 줄게. 네 엄마는 대체 어디 갔니? 달빛이 이렇게 밝은데, 모두 어디에 숨었니?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 멋없게 고백했다가 차였어. 아, 인과관계를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고백이 멋없어서 차인 건 아니야. 내가 소설 같이 얘기해줄게. 정말 시시껄렁한 소설처럼 말이야.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운명의 바람처럼 C를 만났다. C는 인기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내가 C를 보고 있을 동안, 다른 남자애들은 모두 A나 ㄱ, ㅂ을 보고 있었다. 나는 좁은 세계 속에서,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C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C는 울타리 밖에 있었다. 울타리 밖의 세계에서 C는 인기 있는 여자였다. 내가 사랑한 여자는 인기 없으면서, 인기 있고, 여기 있으면서, 저기 있는 여자였다. 마치 비틀즈의 No Were Man 같이. 


C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아니 없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자. C는 실론티를 좋아하는데, 실론티는 맛있으면서도 품위 있고, 매니악 했다. 붉은 홍차의 꿈은 붉은 사랑의 꿈과 환치되었다. 그건 낭만적인 일이었다. C는 나와 같은 D대인데, D대는 명문이고 그녀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미술 특기자로 입학했고, 수능 성적은 중위권이었지만 말이다. 그녀와 사랑하는 것은 2세를 위해 너무도 현명한 일이었다. 그건 합리적인 일이었다. C와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합리적인 사랑이 틀림없었다. 해보진 않았지만 분명 그럴 게 뻔했다. 나는 C처럼 실론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훗날 C와의 사랑에 대한 총평을 내라 한다면 ‘실론티 속에 모든 게 있습니다’ 라고 할 작정이었다. C는 늘 혼자 수업을 들었다. A, ㄱ, ㅂ 의 주위에는 꼭 남자들이 셋 이상은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C옆에 앉았다. 앉을 자리가 그곳밖에 없었다. 아니 대강당이었으니 어쩌면 자리는 많았다. 하지만 운명처럼 내 눈에는 C의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나는 C와 무려 영화까지 같이 보게 되었다. 남녀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은 연인사이에나 하는 일 아닌가. 물론 착각이었다. 아무튼 단 둘이 공원에도 가고, 이름만 없는 데이트를 몇 차례 했다. 어느 덧 나는 C가 내 연인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내가 살던 세계의 범주에서의 얘기다. C와 나는 절친했고 많은 고민을 나눴다. 그 사이 나의 세계에서는 많은 지각변동이 일었다. A와 ㄱ에게 오빠인 남자친구가 생겼고, 좌절한 동기 남자애들은 ㅂ에게 몰렸다. 이에 환멸을 느낀 ㅂ이 반을 떠났다. 새내기 남자애들은 다들 미숙했다. 나는 예외인지 알았다. 나도 미숙했다는 것은 최근에야 깨달은 일이었다. 


C의 세계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다. C에게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고, 그 중에 어느 오빠와 C는 운명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나는 내 세계의 일만 알았지, C의 세계는 몰랐다. 서로의 세계는 파묻힌 고대문명처럼 깊은 곳에 감춰져 있었다. 숨겨진 진실은 어디서든 언제든 부를 수 없었다. 우리는 다들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 같은 세계에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사랑이란 서로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두는 것뿐이지, 세계 자체를 통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지만, 현실적인 선택은 교류일 뿐이었다. 


어느 여름의 절정에 나는 재미없는 고백을 했다.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C의 세계로 가는 문은 스르르 닫혔다. 다시는 열리지 않을 듯이 닫혔다. 내 마음도 닫히고, 다쳤다. 


오늘 낮에 혼자 학교를 거닐다 C와 C의 연인을 보았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손을 꼭 쥐고 벤치에 앉아 있는 C와 C의 연인. C는 내가 알던 C가 아닌, 너무도 낯선 C였다. 난 처음으로 인정했다. C가 사는 세계는 다르다는 것을, 내가 사랑한 건 내 세계에 가두어 놓았던 버츄얼 C라는 것을. 술을 마실까 하다 귀찮아져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꿈속에 버츄얼 C가 나타나 내 손을 꼭 잡았다. C와 나는 닫힌 방에 갇혀 있었다. 


흰둥이가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기 시작했다. 혹시나 엄마의 냄새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해서, 다리 난간에 묶여 있던 끈을 풀어주었다. 흰둥이는 바닥에 코를 바짝 대고는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의외로 냄새를 잘 맡는 듯 했다. 내 가슴 속에 기쁨의 폭죽이 터질 준비가 되고 있었다. 흰둥이는 갑자기 뛰었다. 나도 뛰었다. 달빛이 고마웠다. 흰둥이는 열심히 뛰더니 다리 끝에 가서는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달빛이 미웠다. 


너도 세계가 참 좁구나. 네 세계를 넘어가봐. 애기처럼 끙끙거리지만 말고 말이야. 난 너를 못 키워준대도. 너는 도둑고양이처럼 홀로 꿋꿋이 살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기 싫음 지금 용기를 내. 후회할 일 하지 말고, 지금 엄마를 찾아와! 이 울 보 멍멍아. 모든 것은 지금 이 순간 이 밑에 흐르는 물처럼 지나쳐 가고 있어. 네 엄마의 냄새처럼 모든 것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증발해버려. 그러니 찾을 수 있을 때, 쫓을 수 있을 때 쫓아가. 그렇게 못하겠다면 저 침대로 돌아가서 얌전히 기다려. 후회 말고, 미련 갖지 말고. 너의 선택을 존중해. 알겠니? 내 말 이해하겠니? 그렇게 글썽거리지 말고, 자 선택을 해. 


-개는 몇 바퀴 돌다가 버려진 침대 쪽으로 다시 돌아간다-


겁쟁이. 아니야, 좋은 선택이야. 기다려보자. 엄마 찾으러 간 동안 엄마가 돌아오면 어쩌겠니. 물론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참, 내 시시껄렁한 사랑 얘기 어땠어? 그래 너무 시시껄렁해서 대답도 하기 싫은 거구나.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너와 나는 한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렇게 오늘 처음 보았는데도 말이야. 인간이 각자의 세계를 가지는 건, 인간은 공상을 하기 때문인지도 몰라. 어때 그럴 듯 하지? 너도 그렇게 느끼지? 


흰둥아, 시간이 많이 늦었어. 지금은 방학이긴 하지만 난 내일 알바도 하고 해야 해서 이만 자야 돼. 그런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래도. 자꾸 그러면 신해철씨를 부를 거야아. 어? 보고 싶다고? 하하 사실 나도 그래. 나 신해철 팬이거든. 노래 불러 줄까? 끈 풀어줄테니 따라와. 내가 함께 있는 걱정 말고. 같이 가면 안 무섭지? 자 우리 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보자.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 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타인의 세계로 가는 문은 좁은 문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 작아지는 방법 뿐. 타인의 세계로 가기에 나는 아직 너무 컸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흰둥이와 나는 달빛에 이끌려, 붉은 꿈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냇물처럼 흐르듯 걷고 있었다. 냇물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서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를 데리고 30대 초반으로 뵈는 남자가 조깅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제기천을 수차례 돌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봤다. 자정이 막 넘어가고 있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다시 다리 쪽으로 뛰었다.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던 흰둥이도 영문도 모른 채 뛰었다. 다리로 돌아와 버려진 침대 위에 다시 앉았다. 흰둥이가 무릎 위로 올라와, 퍼질러 앉았다. 조심스레 흰둥이를 다시 다리 난간에 묶었다. 흰둥이는 끈을 다시 묶는 것을 보고는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흰둥아 걱정 말아. 넌 구원 받을 거야. 너는 우리 사람과 달라서, 누구의 세계든 쉽게 들어갈 수 있어. 네가 나에게 쉽게 왔듯, 나도 너에게 쉽게 갔지만, 우리의 만남이 쉬운 건 아니야. 흰둥아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어. 사랑해. 너도 용기를 내. 잠시 아프겠지만, 아픔 없이 성장할 수는 없는 거란다. 저 달빛과 나의 기도가 널 지켜 줄 거야. 안녕. 


나는 흰둥이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흰둥이가 눈물이 괸 눈으로 날 보며 끙끙거렸다. 헤헤, 이 울보. 나는 웃으며 일어나 손을 한 번 가볍게 흔들고는 냅다 뛰었다. 귀청을 찢을 듯한 흰둥이의 울음소리가 제기천에 쩌렁쩌렁 울렸다. 돌아서고 싶지만 그건 흰둥이를 더욱 괴롭히는 일이 될 따름이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는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뒤에 숨었다. 어둠이 나를 덮어주었다.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이렇게 숨을 곳이 있다. 모든 것에는 그림자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마음의 엔진을 공회전 시킨 채 주차된 자동차 뒤에 숨어 있을 런지도 몰랐다. 흰둥이는 지옥에 끌려가기라도 하는 양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기도 했다. 허나 기독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아닌 나는 딱히 기도할 대상이 없었다. 순간, 책을 통해 알게 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위대한 영에게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나 부처는 지금 여기 없지만, 위대한 할머니인 달님은 저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할머니 달님. 위대한 영이신 와칸탕카여, 저 불쌍한 강아지를 도와주세요. 저와 같은 숨을 나눈 저의 형제인 저 강아지를 도와주세요. 저 소중한 생명을 버리지 말고 도와주세요.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이 이 삶에서 제게 요청하는 것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충실히 해결해 나가겠습니다. 저의 이 마음을 믿고 지금 한 번 저를 도와주세요. 당신을 돕겠습니다. 당신과 어머니 대지 위의 모든 생명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저의 문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초대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할머니의 부드러운 달빛으로 흰둥이를 감싸주세요. 


기도가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 조깅하던 30대 남자는 흰둥이의 비명소리를 듣고는,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남자는 흰둥이에게 다가가 흰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베리안 허스키도 흰둥이를 핥아보는 듯 했다. 흰둥이는 울음을 그쳤다. 남자는 잠시 흰둥이를 어르더니 다시 일어서서 다리를 건너가려고 했다. 나는 주문을 외듯 계속 기도했다. 흰둥이는 울고, 그런 흰둥이가 안쓰러웠는지 시베리안 허스키는 주인남자가 잡아 당겨도 꿈쩍 않고, 흰둥이를 핥으며 보듬어 주었다. 결국 남자는 흰둥이를 풀어 한 손에 안고 시베리안 허스키와 다리를 건너갔다. 멀리 냇물 건너편에 남자의 손에 들려가던 흰둥이와 어렴풋이 눈이 마주쳤다. 우린 서로 피식 웃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달과 위대한 영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울타리를 넘는 건 이제 나의 차례인지도 몰랐다. 달빛이 밝아지며 물의 마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2003. 6.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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