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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고양이가 있었다 5

멀고느린구름 2012. 12. 9. 09:50





그러면서 남자친구가 풀어놓는 태양계 속에 자리한 아홉개의 행성과 60여개의 달에 관한 이야기는 끝도 없는 항해로로 내 마음을 떠밀었다. 어느 지점부터인가 나는 키를 놓았고, 노를 버렸다. 남자친구가 황급히 떠나간 호텔 침대 위에 누워서 아침 햇살을 맞았을 때는 먼 우주를 유영하는 보이저 1호가 된 기분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불안감. 남자친구는 보이저 1호는 인간이 만든 것 중에서 지구에서 가장 멀리 가 있는 물체라고 했다. 보이저 2호가 뒤를 따르고 있지만 둘은 아마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떠올렸던 것 같다. 시차를 달리해 태어난 두 성별의 인간은 어쩌면 1977년 8월과 9일에 각각 우주로 쏘아올려진 보이저 2호와 1호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에덴에서 태어난 아담과 이브는 에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생명체인지도 몰랐다. 신은 인간만을 에덴에서 추방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고단했는지 계속 코를 심하게 골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토록 가까이 있다. 그러나 분명했다. 우리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다. 벽으로 거리의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겨울은 점점 자신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스탠드 불빛을 약하게 바꿔 어둠에 몸을 감췄다. 남자친구가 붙여준 야광별이 천정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북두칠성 자리를 그리고 있다. 남자친구에게는 엄마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기로 정했다. 위로 받거나 위로 받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더 나쁜 사람이 되거나 더 좋은 사람이 되거나...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모습으로 머무르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종내에는 헤어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역시 이런 사람이었다고, 이런 사람이었기에 헤어지는 게 맞다고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변수가 생기지 않기를 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매만지며 생각했다. 




5



  다음 날 단짝 친구를 만났다. 3년전 관광가이드 양성 전문대학 입학식에서 만나 전람회와 토이에 관한 이야기로 의기투합하게 된 친구였다. 알고보니 나는 전람회의 서동욱을 그녀는 김동률을, 나는 토이의 김연우를, 그녀는 김형중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우리 역시 모든 결정적인 순간들을 지나친 다음이었기에 아무래도 좋았다. 


엄마의 병 이야기와 남자친구와 헤어질 각오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는 담담하게 들어주었다. 엄마의 병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남자친구와의 이별에 대해서는 적극 동의를 표명했다. 친구도 사과를 추천했다. 이미 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이전부터 친구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우울하고 바람기가 다분해보인다는 게 친구의 평가였다. 친구가 남자친구를 직접 본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여자의 직감은 위대했다. 


나는 친구에게 남자친구와의 이별이 두려워지는 점이 딱 한 가지 있다고 말했다. 


“뭔데?”


친구가 물었다. 


“우주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거.”


라고 나는 답했다. 친구는 한숨을 푹 쉬고 말았다. 내가 철이 없다고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꿈꾸는 소녀가 아니라고 훈계를 했다. 잠자코 들었다.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 내 쪽의 주장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는 내가 자기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안도했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완고하게. 사실, 나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는 어쩌면 그의 전부, 남자친구의 전부라고 여기고 있었다. 




2012. 12. 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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