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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아무런 인사를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 해도
"심봤다!'
라고 외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어. 킨트, 네가 쓴 너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야. 아니, 자서전이 아니라 수기? 아니야. 네가 쓴 소설인 건가?
아무튼 내가 바라는 건 모쪼록 네 눈이 아직은 이 글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거야. 글자 포인트 크기를 높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려해. 왜냐고? 너의 눈에게도 혹시 자존심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난 너와 친해지고 싶거든. 그러니 조심해야지.
너의 글을 읽고 문득 나도 동물원에 가고 싶어졌어. 특히 네가
"동물원 킨트는 단지 계속해서 길을 걸어. 그늘은 날시가 나쁘고 우울해져서, 비명을 지르는 뭉크의 그림 속에 있다고 느끼게 되는, 그런 날들을 좋아해. 그런 날은, 동물원 킨트만이 동물원에 가기 때문이지. 그런 날 동물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그들은 갑자기 알게 돼. 그는 동물원 킨트였던 거야." -23p-
라고 말했을 때. 그때 나는 이미 반쯤 너와 같은 동물원 킨트가 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마도 어느 날 내가 틈틈이 배워둔 일본어로 지하철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대공원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탄 뒤(반드시 사람이 꽉 들어찬 지하철이어야 해!) 다른 사람의 발을 고의로 밟아버린다면. 그리고는 츠마부키 사토시나 카와시바라 다카시처럼 "스미마셍"이라고 발성하며 고개를 조아린다면. 발이 밟힌 상대방의 어찌할 줄 모르는 어색한 표정을 보며 싱긋 웃는다면.
오! 나는 비로소 동물원 킨트가 된 것일 거야. 생각해봐. 그 고독, 그 고립, 그 이방인의 마음! 나는 반일의 나라에서 일본인으로 존재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혼자 대공원역에 내려 서울대공원의 동물원을 산책하는 거지.
그러다가 우연히 하마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입을 너무 크게 벌리고 웃기 때문에 입구멍으로 머리를 밀어넣을 수 있을 정도인 너의 그 진짜 하마 같은 하마를 말이야. 물론 너의 하마와 내가 만난 하마는 분명 다를 거야. 내가 만난 하마는 미겔이거나 깐나일 수도 있지.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하마가 미겔이든 깐나이든, 나까야마이건.
킨트, 네가 그냥 동물원 킨트이듯. 하마도 그냥 하마일 뿐이잖아. 사람들은 참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써. 가령 중국 너구리곰의 이름이 팬더가 맞냐 판다가 맞냐하는 것 따위 말이야. 뭐라고 부르든 어때. 그 중국 너구리곰은 인간들이 자기를 뭐라 부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보도, 두스만, 슈테피, 돼지... 등등 킨트 너의 친구들(친구가 맞긴 한 거야?)의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어. 한스라든지 레베카 같은 이름보단 훨씬 좋잖아. 이름 따위는 존재의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아. 자기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면 또 몰라도 말이야. 하긴 거북섬 원주민들이 쓰는 이름은 좀 다르긴 하지.
킨트, 난 사실 한 때 네가 글을 못 쓴다고도 생각한 적이 있어. 주위의 세뇌도 있긴했지만, 나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이번 너의 글을 읽고 난 괘씸하지만 내 생각을 바꿀 수 밖에 없었어.
특히 '7. 겨울의 유령들' 에서 말이야. 킨트, 너의 환상 속에서 너의 눈동자가 너로부터 분리되고 새하얀 늑대와 네가 달리는 장면 말이야. 나는 한참 동안 그 상상 속에 빠져 지냈지. 사실, 혼자 방에서 네 발로 달리는 연습도 해보았어. 혹시 모르잖아.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니까. 어느 날 새하얀 늑대와 함께 달릴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네 발로 제대로 달리지 못해 늑대들을 놓쳐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난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되겠지. 끔찍한 일이야.
이런 제길! 오, 이런 미안해 킨트. 너에게 한 말이 아니야. 나는 지금 이 글을 도서관 사서용 컴퓨터로 쓰고 있거든. 나의 일자리지. 나는 매일 저녁 5시부터 9시까지 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해. 내가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벌써 10명이 넘는 사람이 자기 신분증에 붙은 바코드를 떼달라며 찾아왔어. 덕분에 나는 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의 70%를 잃어버렸어. 빌어먹을 일이지. 하지만 나는 손님들의 바코드를 상냥하게 떼어주었어. 이건 일이니까 말이야.
킨트, 알겠니? 여긴 나만의 동물원이야. 나 역시 동물원이지. 나는 진정 동물원 킨트가 되었어. 여기 오는 사람들은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않지. 나를 도서관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들은 틀렸어. 나는 도서관이 아니라 동물원 킨트야. 나는 오늘도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어. 배꼽이 너무 자주 빠져서 항상 집에 두고 올 정도지.
이대로 난 이곳의 동물원 킨트가 되어 평생을 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난 떠나겠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물론 "안녕" 이라든지,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따위의 말은 하겠지. 하지만 그걸 진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그렇지? 킨트, 너라면 그걸 알 거야.)
킨트, 네가 하마에게 전한 정겨운 말이 문득 떠올라. 그 말을 다시 너에게 전하며 이만 작별 인사를 하려해. 그래, 알아. 우리는 또 어디선가 만날지도 모르지. 영풍문고나 교보문고 같은 곳에서 말이야. 그때는 물론 너는 <동물원 킨트>가 아닌 다른 이름을 쓰고 있을 테지. <독학자>라든지, <당나귀>라든지 하는 이름.
킨트, 당연한 말이지만 걱정하지마. 하마가 미겔이건 깐나이건, 아니면 진짜 하마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내가 이미 말해버렸으니까. 어쩌면 난 그 말에 책임을 지려할지도 모르지. 한 동안은 어느 정도 너라고 짐작되는 것들을 찾아다니게 될 거야.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너라고 생각했던 게 네가 아닌 걸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다시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너를 찾아 돌아다니겠지. 어떻게 되든 나는 영원히 너를 찾게 되는 거야. 멋지지?
그러면 안녕. 여기는 외로운 사람들의 동물원이야.
"그러니까 하마, 누군가 아무런 인사를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고 해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그것이 십일 월 저녁 일곱 시였고 그리고 부다페스트 거리에서였다면 말이지." -207p-
2006. 3.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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