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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참가자들에게 '말하듯이 불러라'라고 조언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언뜻 아, 그렇구나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 애매모호한 말이다. 헌데 여기 그 정답이 있다. 양희은이다. 양희은 씨는 말하듯이 부르는 노래란 무엇인지 이 음반을 통해 그 진수를 보여준다. 

한참 음악에 취미를 갖고 즐겨듣던 중고교시절 내게 '양희은'이라는 이름을 각인 시킨 것은 아이엠에프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캠페인송이었다. 그렇다. 바로 그 '상록수'다.

깨치고 일어나 끝내 이기리라~

고 호소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높은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아침이슬',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상록수 원제)' 등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를 부른 양희은을, 당시 나는 성악가 같은 성량으로 대곡을 위주로 부르는 지나간 옛 원로가수로만 여겼다.

하지만 2000년 봄. <양희은 - 1991> 이 음반이 발매된지 9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처음으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듣고 울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던 길 버스 안에서였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심야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타고 그녀가 노래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아 성에가 낀 유리창에다 사랑했던 이의 이름자를 써보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내 가슴에 온전히 각인된 노래가 되었다.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지나간 일들에 대한 회한이 깊어질 때, 사랑의 아픔으로 잠 못 이룰 때면 어김없이 이 노래 하나에 의지한 채 시간을 견디곤 했다.

2001년 여름에는 <양희은 - 1991>에 수록된 또 하나의 곡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운 친구에게'. 선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학 와서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깊게 친해졌던 친구와 다투고 둘이서 불꺼진 동아리방에 앉아 '그리운 친구에게'를 반복해서 들었다. 누가 그 노래를 틀었는지 역시 흐릿하다. 중고교 시절 내 줄곧 혼자 지내온 탓에 친구를 대하는 법에 서툴렀던 나였다. 마음이 상한 친구에게 무어라고 딱히 위로하거나 사과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마냥 그 옆에 머물기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20대 초반의 사내 둘이 불꺼진 방에서 양희은의 '그리운 친구에게'를 밤새 듣고 있는 광경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허나 그때는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하도 반복해 들은 탓에 그 노래는 몇 달간이나 귓가에 이명처럼 떠돌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리운 친구에게'가 BGM이나 되는 듯이 들려온다.

강물은 흐르고 흐르는 강물 따라 세월도 흘러
지나가 버린 바람처럼 우리들의 젊을 또한 가 버리고
너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강물은 흐르고 세월도 참 많이 흘러, 우리가 거닐던 제기동의 세느강도 청계천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다시 그 푸르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만 같으니. '그리운 친구에게'는 내게는 영원한 청춘의 노래가 되었다.

<양희은 - 1991>에는 위에 소개한 두 곡 외에도 주옥 같은 명곡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해 겨울'은 찬 비가 내린다는 가사 탓에 비슷한 시를 써서 내게 보여주었던 한 인연이 떠오르게 하고, '가을아침'은 햇살 좋은 가을날에는 항상 켜놓는 곡이다. '저 바람은 어디서?'는 여행을 떠날 때면 버스나 열차 안에서 어김없이 듣게 된다. '11월 그 저녁에'는 참 정직하게도 11월이 되면 줄곧 내 방안에 가득 울려퍼지는 11월 테마송이다. '나무와 아이'는 전람회 1집의 '소년의 나무'와 더불어 동심을 떠올리고 싶어질 때 듣는 따스한 노래다. 마지막 트랙, '잠들기 바로 전'은 제목처럼 잠들기 바로 전에 자장가처럼 종종 듣는다.    

'나무와 아이'를 제외한 전 곡을 한국의 에릭크랩튼으로 일컬어지는 이병우 씨가 작곡했다. '가을아침', '11월 그 저녁에'를 제외한 전 곡의 작사가는 양희은 씨 본인이다. 가장 서정적인 보컬리스트와 가장 서정적인 기타리스트가 만나 가장 서정적인 불후의 명반을 만들었다.

죽은 뒤에 내 무덤가에 단 한 장의 음반만을 계속 재생해준다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한 장의 음반을 택할 수 있다. <양희은 - 1991>이다. 


2012. 1. 11. 멀고느린구름



1. 그해 겨울 ............양희은/이병우 
2. 그리운 친구에게 ..........................양희은/이병우
3. 가을아침 ..............................이병우/이병우 
4. 저 바람은 어디서? ............................. 양희은/이병우 
5. 11월 그 저녁에 ..............................이병우/이병우
6. 나무와 아이 ..........................양희은/F.SOR
7.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양희은/이병우
8. 잠들기 바로 전 ..................... 양희은/이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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