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토탈 이클립스 (1995)

Total Eclipse 
8.1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데이빗 튤리스, 로만느 보랭제, 도미니끄 블랑, 펠리시 파소티 카바바에
정보
드라마 | 프랑스, 영국 | 111 분 | 1995-12-02
글쓴이 평점  



열매, 꽃 , 잎, 가지들이
여기 있소. 그리고
오로지 당신만을 향해 고동치는
내 마음이 여기 있소.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찢지는 말아주오
다만 이 순간 그대 아름다운 두 눈에
부드럽게 담아주오.

새벽 바람 얼굴에 맞으며
달려오느라
온몸에 얼어붙은 이슬 방울
채 가시지 않았으니.

그대 발치에 지친 몸 누이고
소중한 휴식의 순간에 잠기도록
허락해주오.

그대의 여린 가슴 위에
둥글리도록 해주오.

지난 번 입 맞춤에
아직도 얼얼한 내 얼굴을.
그리고 이 선한 격정이
가라앉게 그대
달래주오

그대의 휴식 속에
가만히 
잠들 수 있도록. 

- 1874, 폴 베를렌느. Green.


 

  베를렌느의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가을, 만화가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속에서 였다. 한국 순정만화 희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호텔 아프리카>에는 동성애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이 들어 있다. 그 중의 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이 시는 1870년대 유럽을 무대로한 천재 시인 랭보와 낭만주의 시인 베를렌느의 사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학에 와서야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룬 <토탈 이클립스>라는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매번 봐야지 하하는 생각뿐 실천에 옮기지를 못했다. 그리고 30대가 되어서야 오늘 아침 끄느름한 날씨를 핑계 삼아 오래전 사두었던 DVD를 플레이어에 걸었다. 영화에 애정을 가져야 겠다는 핑계로 산 프로젝터로 혼자 어둑한 방안에 앉아 1870년대의 랭보와 베를렌느의 격정적인 연애을 훔쳐보았다.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세상에는 동성애 반대론자가 있고, 동성간의 사랑을 혐오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이성애자이지만 동성애자인 이들을 여럿 만났고 그들의 사랑에 대해 아무런 혐오나 이견은 없다. 단지, 내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고백을 해오면 조심스럽게 사양할 뿐. 

  랭보와 베를렌느의 사랑은 영화 속에서 지극히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들의 파멸마저 아름답다. 랭보역을 젊은 날의 디카프리오가 맞지 않았다면 물론 그런 아름다움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디카프리오는 정말 '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나고 있다. 미소년이라는 말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말 같다. 이성애자인 나로서도 디카프리오 같은 외모의 젊은 천재 시인이라면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져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베를렌느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클립스(Eclipse)란 별과 별이 공전 궤도 상에서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지구에서 볼 때 서로 포개진 것처럼 하나의 별이 하나의 별을 덮어버리는 현상이다. 일식과 월식이라고 할 때, '식'이라는 현상이다. 영화의 제목 토탈 이클립스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둘은 서로 완전히 포개어지는 한 쌍이다. 

  그러나 하나의 별이 하나의 별을 덮어버리면 덮어져버린 별은 빛을 잃는다. 그 둘이 완전히 포개어질 수록 하나의 별은 완전히 빛을 잃어버린다. 빛을 잃어버린 것은 베를렌느였을까, 랭보였을까. 이클립스의 맹점은 또 하나 있다. 지구에서 우리가 보기에 두 별은 서로 포개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궤도를 서로 어긋나게 비켜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을까.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 위해 서로에 닿기 위해 상대의 깊이를 향해 치달려 가지만 결국 우리는 전혀 서로 다른 궤도 상에서 엇갈려 지날 뿐인 것은 아닐까. 

  빛과 어둠, 이성애와 동성애, 육체와 영혼, 순간과 영원,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순수와 세속. 영화 속에서는 이원법으로 나뉘어진 서양 철학의 주제들이 끊임없이 회자되고 변주된다. 그리고 영화 속의 중심 화자인 폴 베를렌느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존재이다. 감독 아그네츠카 홀랜드는 폴 베를렌느를 내세워 쉼없이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베를렌느는 수많은 선택의 세계에서 끝내 아무것도 명확히 선택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떠돌고 있을 뿐. 

  서구는 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선택이 이것이었을 때는 저것을 죽이고, 저것이었을 때는 이것을 죽여왔다. 이른바 동양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 원주민 등 비서양에 속했던 문명은 삶을 전체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순간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하려고 했다. 사람도 세상도 숱한 변화 속에 있는 유기체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영원에 열정을 바치기보다는 삶 그 자체에 대해 고민했고 너의 변화보다 나의 변화에 에너지를 쏟아왔다. 

  랭보는 변화하기를 거부했고, 베를렌느는 랭보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잃어버렸다. 시간이 흘렀을 때 두 사람이 처음 사랑했던 서로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둘에게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랭보는 베를렌느를 잊고, 베를렌느는 랭보의 추억 속에 영원히 갇힌다. 그들은 정말 사랑한 걸까. 여전히 사랑은 참 어렵다. 


2011. 11. 23. 멀고느린구름.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