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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리뷰

김영하 - 여행자(하이델베르크)

멀고느린구름 2011. 11. 11. 12:08
김영하의 여행자 - 하이델베르크 - 6점
김영하 지음/아트북스


"나는 하우프트슈트라세를 가로지르는 비둘기 떼를 뚫고 성령교회의 높은 첨탑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갑니다. 나는 열두 살의 그 해파리처럼 투명한 육신으로 흐느적거리며 허공을 부유합니다. 나의 눈은 맑고 몸은 유연하며 정신 명징합니다. 이 높은 곳에서 나는 오래된 도시를 내려다봅니다. 양갱처럼 검은 네카어 강에는 오렌지빛 석양이 깔리고 있습니다. 삶을 생각하기에 좋은 도시는 바로 이런 곳입니다. 나는 어쩐지 다음 생에도 이 도시에 오게 될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안녕." 

- 김영하 <밀회> (여행자 41쪽)

  
내가 콘탁스 G1을 처음 만난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다. 한 곳의 여행지, 한 대의 카메라, 그리고 한 편의 이야기라는 기획으로 만들어진 이 책 <여행자>에서 김영하는 콘탁스 G1 하나로 하이델베르크의 고즈넉한 풍경을 담아낸다. 하우프트슈트라세 광장과 성령교회, 네카어 강변이 담긴 콘탁스 G1의 뷰파인더에는 새벽녘의 안개와 여행자의 우수가 서려 있다.

  소설책도 아니고 여행서적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진집도 아닌 이 모호한 책은 그 모호함으로 인해 빛이 난다. 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보면, 무언가 그리운데 그 대상이 아슴푸레하기만 할 때, 짙게 내린 커피의 쓴맛이 쉬이 가시지 않는 밤에, 그런 순간들이면 나도 모르게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어 펼쳐보게 된다. 초점이 어긋난 사진들, 빛을 잔뜩 머금고 있지만 긍정을 말하지 않는 풍경들,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은 자에 의해 찍혀진 것 같은 장면들, 방금 떠오른 아주 먼 옛날의 추억을 재빨리 현상한 듯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네카어 강변을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책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밀회>는 그닥 특징이 있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찍은 사진들 역시 사진 애호가의 시선에서는 그저 되는 대로 찍어낸 스냅샷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우프트슈트라세 광장의 흑백사진으로 프린트된 책의 표지를 넘기면 시작되는 독백과 같은 소설, 이어지는 콘탁스 G1으로 담아낸 하이델베르크의 풍경, 말미에 실린 카메라에 대한 작가의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흐르는 일관된 정서가 마치 한 편의 단편 영화를 감상한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내적인 음악마저 담겨 있다고 느낀다. 

  유명한 대가의 사진집이 아니라,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사진의 매력을 느꼈고 머지 않아 콘탁스G 계열의 렌즈를 카메라에 달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떤 이에게는 이 책이 모든 것이 어중간하기만한 졸서로 혹평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책을 소개하고 있는 나마저도 미감이 떨어지는 이로 혹평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의 찌푸린 하늘을 보고서 나는 또 이 책을 펼쳐들고 말았다. 

빛이 무언가를 비추고, 
그 무언가가 받은 빛을 되쏘고 그리하여 그 빛이 다시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것.
그런 빛의 순환을 기록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메라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141쪽

이라는 감상적인 구절마저 이 책에서는 적절한 하모니가 된다.

동봉된 음반을 OST 삼아 무한반복해 들으며 잿빛의 공백한 하늘을 내어다본다.
그리움은 꼭 그리움의 대상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2011. 11. 1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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