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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양말 벗기 무브먼트 3

멀고느린구름 2011. 9. 28. 22:12


3. 오직 벗고 또 벗을 뿐.

   예상은 했지만 압둘 아자르를 섭외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양말 벗기 무브먼트'의 한국지부장을 만나는 일은 커녕 통화하는 일조차 힘들었다. 교환원을 통해 대외홍보부서로 연결한 후, 대외홍보부서의 실무자를 거치고, 홍보부장을 지나, 비서실에 도달해, 비서3에 의해 비서실장과 겨우 연락이 닿으면, “죄송합니다. 지부장님은 오늘 출타 중이어서 통화가 어렵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제기럴. 통화 약속을 잡으려고 하면 213번째로 대기 시켜주겠다는 대답따위를 겨우 들을 뿐이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간간히 압둘 아자르의 대표저서인 <양말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자유 그 이상의 자유>, <내게는 꿈이 두 개 있습니다>, <소유냐 자유냐> 따위를 탐독하며 새로운 방법을 궁리했다.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은 역시 와이티엔 뉴스였다. 항상 가던 도서관 휴게실에 앉아 <소유냐 자유냐> 중, “사람들은 소유의 정도로 성공이냐 아니냐를 가린다. 하지만 나는 자유의 정도로 성공이냐 아니냐를 가린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 소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는 진정 소유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고. 아니다, 오히려 자본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있었다. 와이티엔 뉴스에서 들려오는 앵커의 목소리에 갑자기 귀가 확 열렸다.

“압둘 아자르 씨가 내일 오후 1시,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드디어 내한합니다. 압둘 아자르 씨는 특별히 마련된 S호텔의 특실에 머물며 한국에서 일정을 소화할 예정입니다. 저희와의 인터뷰도 예정되어 있죠, 김 기자님?”

  저 방송국에는 기자가 김 기자밖에 없는 것일까 하는데 잠깐 생각이 옮겨 가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정보는 내일 압둘 아자르가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한다는 사실이었다. 기회는 그때뿐이라는 확신이 섰다. 휴대폰을 꺼내 글을 기고하고 있는 인터넷 언론매체의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압둘 아자르를 공항에서 단독 취재하겠다,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지원해주지 않겠다면 칼럼 연재를 이주를 끝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완곡한 협박도 덧붙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취재차량이 집 앞에 도착했다. 카메라 감독, 오디오 감독, 촬영보조, 통역에 별도 운전기사까지 붙은 풀멤버였다. 운전보조석에 올라 취재기자 명찰을 양복 왼쪽 가슴에 핀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출발. 인천공항까지 이어진 도로는 평일 오전인 덕분에 한산했다. 공항 앞에는 공중파 3사를 비롯해, 와이티엔, 조중동, 한겨례, 경향 등등 주요 국내 매체는 물론 씨엔엔, 프랑스 2티비, 로이터, 알자지라 등의 차량도 눈에 띄었다. 모든 매체가 독점 인터뷰 또는 극적인 장면을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따내야 한다. 이것에 어쩌면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다. 뭐,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준은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 쪽 취재팀은 덩치가 크고 얼굴이 험하게 생긴 촬영보조를 앞세워 취재진의 장막을 뚫고 최전선 대열에 간신히 합류했다. 압둘 아자르의 도착 시간은 점점 가까워져 갔다. 톨게이트 앞은 폭풍전야처럼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카메라를 붙잡은 이들은 조심스레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대었다. 항공기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출구 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다. 승부다. 자동문이 열리고 압둘 아자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번쩍 번쩍 불꽃이 터졌다. 촤촤촤촤착. 촤촤촤촤착. 차륵차륵. 차륵르르르르륵. 요란한 셔터 소리가 대합실을 가득 채웠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을 무리지어 다니는 야생 짐승들의 소리 같았다. 압둘 아자르는 두 손을 가슴께에 가지런히 모은 합장 자세로 유유히 취재진 한 가운데로 걸어왔다. 검정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의 움직임 분주해졌다. 취재진은 모세의 기적을 재연하기로 약속한 것처럼 반으로 쩍 갈라졌다. 누구도 감히 중앙으로 뛰어들어가지 못했다. 압둘 아자르의 카리스마에 취재진마저 압도당한 것이었다. 그때 패기넘치는 젊은 기자가 압둘 아자르를 향해 외쳤다. 와이티엔 기자였다. 이런 바로 그 김 기자였다. 

“압둘 아자르 선생님. 오늘 인터뷰 예정인 와이티엔입니다. 한국에 오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압둘 아자르 뒤를 따르던 이마에 차크라를 한 여성이 압둘 아자르 가까이에 다가가 김 기자의 말을 통역해 주는 듯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압둘 아자르는 조용히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살며시 미소를 띠고 자기의 발을 가리켰다. 맨발. 일순간 현란한 불빛이 압둘 아자르의 발을 난타했다. 천둥 소리 같은 셔터음이 이어졌다. 이내 압둘 아자르는 손가락을 거두며 다시 합장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었다.

“오직 벗고 또 벗을 뿐.”

수십 여개에 달하는 취재매체의 기사제목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2011. 9.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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