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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양말 벗기 무브먼트 2

멀고느린구름 2011. 9. 23. 20:47




2. 양말 공장 노동자 대표 고 씨



  500평 남짓의 양말 공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플래카드에도 예의 그 문구가 써있었다. 


‘압둘 아자르를 고소합니다. 그놈 때문에 공장 망했습니다. 전 품목 90% 세일!’  


커다란 철문은 활짝 열린채로 양쪽 기둥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수위실에 수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를 몰고 공장 안까지 들어가 반듯하게 그어진 주차선 안에 차를 대고 내렸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사장실이 있을만한 건물을 찾는데 80미터 부근에 푸른 천막이 보였다. 기다란 테이블이 늘어서 있고, 작업복으로 여겨지는 복장을 입은 몇몇 사람이 서서 무언가를 분주히 정리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한 사람이 내 쪽을 알아채고 하던 일을 멈추고 황급히 달려나왔다.


“아이구 오셨습니까. 오 기자님!”


키가 170 정도 되어보이는 남자였다. 머리는 희끗희끗했지만 얼굴은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게끔 어려보였다. 모두가 동일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 탓에 누가 사장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별 수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 사장님이십니까?”


“아닙니다. 저희 공장은 사장이 없습니다. 모두 노동자입니다. 저는 이곳 노동자 대표인 고 씨라고 합니다.”


“아, 사장이 없다구요? 독특하네요.”


“독특할 것 없습니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 함께 공평하게 나눈다. 그게 우리 공장의 철칙이었으니까요.”


“과거형이라 묘하네요.”


“하하, 네 좀 묘하지요.”


  나는 국내에서는 나름대로 영향력이 막강한 한 인터넷 언론매체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쓰는 칼럼리스트였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씨는 나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예의바른 인물이었다. 고 씨가 나를 동료 노동자에게 유명한 인터넷 신문의 기자라고 소개하자 판매대에 서있던 5명 남짓의 초롱거리는 눈빛이 나에게 일순간 달려들었다. 눈이 부셔서 몇 번이나 눈을 끔벅거려야 했다. 기자가 아니라 칼럼리스트라고 정정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 씨의 소개가 끝나자 어색한 침묵이 500평의 공장을 짓눌러 왔다. 나는 괜히 판매대 위의 양말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판매는 잘 됩니까? 전단지도 많이 붙여두신 것 같던데.”


고 씨는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동료들의 눈치를 살핀 후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기자님, 그게 참…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벌써 여기 공장에서 이렇게 판매를 시작한 지 한 달째입니다. 그런데 한 켤레도 팔지 못했습니다.”


“한 켤레도요?”


“한 켤레도입니다.”


“선생님, 이런 말씀 죄송한데 이렇게 공장에서 할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서 판매를 하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맞았습니다.”


“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 어째서?”


“그게 아니고요. 정말로 맞았습니다. 주먹으로. 양말 벗기 무브먼트 회원들한테요. 과격한 사람들도 많더군요. 동대문에도 가보고 남대문에도 가봤습니다만… 지금 저희가 이렇게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래도 남의 공장까지 쳐들어오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습니다만… 좀처럼 사람이 찾아들지를 않습니다. 빨리 다른 길을 모색해야겠지만 그래도 양말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도 모두 들어서…젠장. 이게 다 그놈 때문입니다!”


“압둘 아자르 말씀이시죠?”


“네, 그 근본도 모를 양놈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기자님, 제발 저희 억울함 좀 풀어주십쇼. 부탁드립니다.”


고 씨가 ‘부탁드립니다’라고 발화하자마자 최소 4시간 이상은 연습했다는 양 다른 노동자들도 일동 “부탁드립니다!”를 외쳤다. 이 사람들이 뭔가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꼈지만, 기실 부담감보다는 흥미로움이 앞섰다. 솔직히 재밌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좀 더 뻥을 치기로 했다. 


“아, 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사실, 저도 최근에 압둘 아자르의 ‘양말 벗기 무브먼트'에 대해 학문적으로 깊게 연구를 하던 차였습니다. 그러면서 이건 뭔가 허점이 있지 않나, 혹은 지나치게 획일화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히틀러가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세계는 압둘 아자르를 따르는 사람과 그외의 사람들로 나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이건 또 다른 나치즘의 광기일 수도 있습니다.”


“아, 네네. 옳은 말씀입니다.”


고 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눈동자가 더 형형한 광채를 띠기 시작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압둘 아자르가 다음 달에 내한합니다. 그때 아주 특별한 대담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그 대담의 주인공은 바로 선생님과 압둘 아자르입니다. 사회는 제가 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그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겠습니다!”


고 씨의 자신감이 대체 어디서 샘솟는지 근원을 알 수 없었으나, 그렇기에 몹시 흥미로웠다. 나로서도 과연 압둘 아자르를 대담 자리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오케이. 좋습니다. 고 선생님. 제가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은 선생님의 몫입니다. 괜찮습니까?”


“문제 없습니다.”


고 씨는 자신이 넘쳤다. 고 씨의 호기로운 발언에 동료 노동자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아, 이건 이미 모두 기립해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나는 고 씨에게 명함을 전달하고 고 씨의 연락처를 받아 다시 차에 올랐다. 고 씨와 동료들은 마치 사단장을 배웅하는 부하 장병들처럼 일렬로 도열해 내 차가 공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과제는 압둘 아자르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2011. 9.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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