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긴 소설

양말 벗기 무브먼트 1

멀고느린구름 2011. 9. 21. 22:09


1.  압둘 아자르를 고소합니다

   인간의 해방은 어디에서 오는가. 종교인가. 혁명인가. 쾌락인가. 그도 아니면 노동인가. 나는 이른 바 ‘양말 벗기 무브먼트'를 전세계적으로 확산 시키고 있는 압둘 아자르와 그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한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양말 벗기 무브먼트'로 인해 인생이 파탄 지경에 이른 노동자 고 씨(실명 밝히기를 거부함)의 사연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대구의 평균 온도가 34도에 이른다는 기상 보도가 나왔던 지난 여름이었다. 형편 없는 풍력을 자랑하는 1000원짜리 문구점 부채를 부치며 도서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길가의 전봇대에 지저분하게 붙은 벽보의 자극적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압둘 아자르를 고소합니다. 그놈 때문에 공장 망했습니다. 전 품목 90% 세일!’ 

그리고 밑에는 누구의 것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휴대폰 번호가 조그만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이었다. 문구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지만 공신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섣불리 전화를 걸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나 역시 피식 웃고는 도서관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아 ‘진보정치와 노동운동’이라는 제하의 논문 초고를 작성하다가 좀처럼 글이 풀리지 않아 도서관 휴게실에 들렀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로 벽면에 걸린 티브이에서 나오는 와이티엔 뉴스를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다음은 주요 외신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 사람의 열풍이 대단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설문 조사를 했는데, 설문 조사 결과가 놀랍다면서요. 김 기자님.”

“네, 화제의 인물 압둘 아자르 씨가 국제적으로 양말 벗기 운동을 펼치면서 양말을 신지 않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최근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3%가 더 이상 양말을 신지 않는다고 답했고요, 32%가 앞으로 양말을 신지 않을 계획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겨우 15%만이 앞으로도 계속 양말을 신겠다고 답했는데요. 이런 추세라면 몇 년 이내로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양말을 신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그렇군요. 이렇게 양말 벗기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이유, 전문가들은 어디에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까?”

“네, 많은 전문가들이 1960년대 중.후반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운동'이 압둘 아자르의 ‘양말 벗기 무브먼트'를 통해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규율, 기성세대에 대한 혐오감, 자연과 조화되는 삶에 대한 동경 등이 ‘양말 벗기 무브먼트'와 결합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네, 사실은 저도 오늘 양말을 신지 않았습니다. 김 기자님은 양말 신으셨습니까?”

“하하, 저도 신지 않았습니다. 이게 처음에는 속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어색했는데 자꾸 신지 않는 습관을 들이니까, 이제는 더 이상 신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이 양말을 벗으니까 뭔가 자연과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한결 자유롭다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양말 산업 종사자들인데요. 이들은 최근 성명을 발표하고 압둘 아자르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도 했습니다. 또, 압둘 아자르가 다음 해방 프로젝트로 ‘속옷 벗기 무브먼트'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 속옷협회에서도 대응 준비로 분주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채널을 아이돌 댄스그룹이 나오는 엠넷으로 돌려버리는 탓에 내가 본 것은 거기까지였다. 자리로 돌아왔지만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은 논문의 문장이 아니라, 도서관으로 오는 길에 보았던 벽보의 문구였다. 인간을 종교적으로 해방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전세계인의 양말을 벗기고 있는 압둘 아자르. 허나 그로 인해 오히려 해방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이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양말을 신든 벗든 아무 상관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양말을 신느냐 벗느냐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인간들이었다. 양말을 신는 것이 좋으냐, 벗는 것이 좋으냐 그 가치 판단을 떠나서 나는 그들에게 견딜 수 없는 호기심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기필코 그 두 사람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대담을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행여 벽보가 그 사이 뜯어졌을까봐 전봇대가 있는 장소까지 전력을 다해 달렸다. 벽보는 멀쩡했다. 서둘러 휴대폰에 번호를 찍느라 세 번이나 번호를 잘못 입력했다. 숨을 고르고 간신히 번호를 입력했다. 통화. 신호음. 딸칵.

“여보세요. 압둘 아자르 때문에 망한 양말 공장입니다.”

웃음이 터져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들은 진심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2011. 9. 21. 멀고느린구름.

'소설 > 긴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말 벗기 무브먼트 5  (0) 2011.10.05
양말 벗기 무브먼트 4  (1) 2011.10.01
양말 벗기 무브먼트 3  (0) 2011.09.28
양말 벗기 무브먼트 2  (0) 2011.09.23
예스터데이 연재를 끝내며  (7) 2011.07.04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