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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멀고느린구름 2011. 9. 7. 05:33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정작 지금 내가 반복해 듣고 있는 건 산울림의 '찻잔'이다.
9월이 되고 얼마간의 열대야를 끝으로 여름은 끝이 난 것 같다.
하늘의 높이로만 보면 오롯한 가을이다. 손대면 시릴 정도로 차가울 것만 같은 파란색의 하늘이다.

여름 내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열병을 앓았다.
오래된 열망이 다시 한 번 마음 속에서 사그라들다만 불씨를 일으켰다.
그것은 나를 고양 시켰고, 지금까지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되도록 이끌었다.
내 속의 모든 긍정성을 불러냈고 모든 친절함과 누구에게도 온전히 보내준 적 없던 사랑도 꺼냈다...

*

얼마 전에 직장 동료들에게 내가 직접 내린 원두 커피를 대접했다.
도구를 모두 직장까지 가져가서 현장에서 바로 내려준 것이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해 옅게 내렸다.
먼저 시음을 해본 결과 괜찮은 맛이 나왔다.
날씨도 커피를 마시기에 최적이었다.
예열한 잔에다가 정성스레 커피를 담아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기대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다.

"으엑! 이렇게 쓴 걸 어떻게 마셔?"
"이거 제대로 만든 거 맞아?"
"바리스타했단 걸 못 믿겠는데?"
"저기 뜨거운 물 남는 거 있으면 좀..."

*

사람의 마음도 내가 내린 커피와 같지 않을까.
여름 내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적절한 농도의 커피를 대접했던 것이다.
허나 상대에게 내 커피는 맞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농도의 커피가
적절한 모습의 인연이 존재한다.
내 커피에 상대가 적응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인위'고
저마다 알맞은 농도의 커피를 마시려 하는 것은 '자연'이다.
인위가 자연을 거스르려 할 때 '불화'가 발생한다.
불화는 사람을 쓸쓸하게 만든다.

스스로 나직이 주문을 읊조려본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커피를 내리려고 애썼다.
그래 이제 됐다. 나는 최선을 다 한 거다.
이렇게 쓰는 순간에도 아쉬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알람이 울린다. 잠을 이루지 못했음이 명백해진다.

언젠가 세월이 흘러 이 순간을 떠올리며
또 하나의 문장을 모니터 위에 올려둔 채
상념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라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호젓한 바람이 들어와 방 안을 휘젓고 나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김창완 아저씨의 목소리가 적이 누그러진다.
가을로 걸어가자.


2011. 9. 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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