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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새로운 소설들

멀고느린구름 2011. 8. 3. 05:18

장편 공모전에 낼 새로운 소설로 무얼 쓸지 고민 중이다. 내 스마트폰에는 68개의 소설 메모가 있으며, 싸이월드 비공개 게시판에는 72개의 프로젝트가 쓰여 있고, 내 방의 코크보드에는 15개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그들 중 장편소설이 될만한 이야기는 대략 10여개 즈음이다. 

문제는 장편소설로 쓸만한 주요 이야기들이 모두 상당한 '학습'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소설을 쓰려면, 유럽의 주요국가들의 지리적 특성과 근현대사를 전공자 수준으로 독파하거나, 1930년대 한국문단의 특성과 당대에 활약했던 문인들의 개인사를 시시콜콜하게 연구해야하거나, 최소 28개국의 론리플래닛(유명한 여행안내서)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도 아니면 동물생태학이나 동물도감따위를 충실히 읽어내려가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이 여간 녹록치 않은 탓에 쉬이 시작하기가 꺼려지고 있다. '전업을 하지 못하는' 투잡 작가들이 충실한 연구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좀처럼 창작해내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렇다고 '예스터데이'처럼 내 살을 깎아먹는 작품을 다시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이런 작품은 평생에 몇 번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허송 세월을 보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쓸 수 있을 때 쓰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모든 예술은 순간의 미학이다. 시간의 축적을 통해 탄생하는 작품도 탄생해야할 순간에 탄생하지 않으면 태아 상태로 자궁 속에서 사망하고 만다.

많은 취재가 필요하지 않은 중편을 써볼까도 생각 중이지만... 좀 더 간절히 쓰고 싶은 것은 역시 엄밀한 취재가 필요한 본격 장편 쪽이다. 가능하면 이번에는 완벽하게 세계적인 고전이 될만한 작품을 쓰자는 야심이다. 국가를 초월해서 인류 보편에게 가닿는, 인간의 본질을 깊이 탐구해가는 작품을 쓰고 싶다. 쓸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쓰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그 간극을 채워주는 것이 '공부'다. 작가는 타의든 자의든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나는 존재다. 내가 공부를 즐기는 타입이어서 다행이다. 

'예스터데이'의 퇴고 작업은 아직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나는 초고를 쓴 뒤 내 글이 최대한 낯설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퇴고를 시작하는 편이다. 오래되면 오래될 수록 글은 낯설어지고 냉엄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래 묵히면 작품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고 만다. 손수 커피를 내릴 때 첫 물로 뜸을 들이는 것은 30초가 가장 적당하다. 그보다 덜하면 풍미가 떨어지고, 과하면 잡미가 첨가된다. 글에도 뜸을 들이는 적당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퇴고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프린터가 없는 탓이다. 대학 근처에 살 때는 항상 학교 앞 복사집에서 원고를 프린트했었다. 허나 지금 사는 동네에는 그런 곳이 있을리 만무하다. 초고를 메일로 전송해 사무실에서 뽑는 방법이 있으나 조금 귀찮아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가 그 귀찮음을 극복하고 사무실에서 '예스터데이'를 인쇄하는 날이 아마도 가장 뜸이 적당하게 든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나는 낙천가인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오블라디 오블라다.


2011. 8. 3. 새벽. 날파리가 빠진 커피잔을 망연히 바라보며.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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