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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브람스의 청명한 하늘

멀고느린구름 2020. 12. 19. 09:09

오직 자기만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와 쾌활하고 낙천적인 어머니가 물려준 유전자의 힘으로 온갖 가혹한 날들을 견뎌왔으니, 태어난 그 자체로 이미 빚을 진 셈인 것이다. 혼자 빈 거실에 앉은 이 순간에도 아침에 떠오른 태양빛이 나를 관통하고, 1897년에 사망한 브람스의 음악이 마음을 위로한다. 

 

문득 아득한 태고의 인간을, 아침이 밝아오거나, 별이 뜨기 시작할 무렵 동굴의 시간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와 별반 다름 없는 뇌를 지녔을 10만 년 전의 나, 전생의 나는 어떤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조합해내고 있었을까. 하늘은 여전히 하늘이었을 테고, 들판은 들판이었을 것이다. 꽃은 꽃이고 바람은 역시 바람이었을 그때,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까. 멍하니 넋을 놓고 있으면, 시간여행 장치가 없이도 아득한 무한의 시공들과 연결된 것처럼 느껴진다. 

 

‘순간’이란 말처럼 공허한 말은 없다. 순간도, 지금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오직 지금을 살라”는 그럴 듯한 격언은 실체가 없는 농담일 뿐이다. 인간의 영혼은 시간 속에 있지 않고, 시간 위에 있다. 시간의 위에서 광각으로 이쪽과 저쪽을 바라본다. 얼마나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느냐에 따라 영혼의 통찰력은 결정될 것이다. 

 

만나야 할 때가 있다면, 헤어져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생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의 의지를 강하게 거슬러야 할 때도 있지만, 순응하는 게 나을 때도 있다. 바람도, 물도, 계절도 가야할 곳을 알고 흘러가고 있으니, 가끔은 내 생각의 용량보다 더 큰 생의 흐름을 신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늘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 없다. 브람스는 1897년 4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1896년 12월 19일에는 살아 있었다. 그때 브람스가 문득 올려다본 오스트리아의 하늘도 오늘처럼 맑았을까. 그러했다면 기쁘겠다. 

 

2020. 12. 1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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