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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존재는 모두 흔들리고 점멸하며

멀고느린구름 2020. 11. 3. 10:31

모든 삶은 흔들리며 제 자리를 지킨다. 다용도실에 있는 드럼 세탁기는 이사 온 지 2년이 다 되도록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리 높이를 맞춰 세탁 시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을 해놓아도, 한 번 빨래를 마치고 나면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사 오면서 떨어져나간 고무발굽 때문인가 싶어 새로 사다가 붙여도 보았으나 허사였다. 간신히 위치를 맞춰 가장 덜 흔들리는 자리에 세탁기를 놓았다.

 

그러다가 몇 달 전 주인집 어르신 내외가 아랫 집에 물이 샌다는 이유로 찾아와서 다용도실을 살펴보다가 간신히 맞춰놓은 세탁기를 안 쪽으로 쑥 밀어넣고 가버렸다. 그 자리에 두고 빨래를 돌리니 세탁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나게 춤을 췄다. 그런데 놀랍게도 빨래를 마친 세탁기는 거짓말처럼 제 자리로 돌아와 멈추는 것이었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세탁기는 격렬하게 흔들리다가도 제 자리를 찾았다. 

 

고층 빌딩을 설계할 때는 일부러 적당히 바람에 흔들리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탁기가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둬야겠다고 생각한 나의 강박이 그동안 세탁기를 방황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든 삶은 흔들린다. 흔들리며 자기의 자리를 지킨다. 

 

내가 알던 누군가의 부음을 들을 때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러면 순간 우리가 딛고 있는 지구가 무한히 움직이며 우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 용케도 각자의 자리에 우뚝 서있다. 나는 모든 생명들이 이곳과 이곳이 아닌 어딘가 사이를 늘 오가고 있다고 믿는다. 깊은 밤 잠이 들면 우리는 이곳의 막을 내리고, 어딘가의 막을 올린다. 어딘가를 걷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고, 때로 공포에 짓눌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시 아침이 오면 어딘가의 삶을 끝나고, 다시 이곳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말일 것이다. 적어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흔들리고, 켜졌다, 꺼졌다 점멸하며 늘 거기에 있다. 어제 떠나간 모든 존재들도 우리가 알 수 없는 형태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별이나 반딧불이처럼 깜빡 깜빡 영롱한 불빛을 발하며 다가올 추위를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다시 이곳의 삶을 켤 때까지, 어딘가에서 모두들 무사하기를, 적당히 흔들리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2020. 11. 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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