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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첫 함박눈에게

멀고느린구름 2020. 12. 13. 09:22

2년 간 비바람을 맞아 다 썩어버린 울타리를 지난 가을에야 새 것으로 바꿨다. 이전 울타리로 쓰였던 상한 나무막대 50여 개는 길이가 1미터 80이나 되는 것들이어서 어디다 버리지도 못하고 창고에 넣어두었다. 창고 문을 열 때마다 눈에 밟혔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어제는 큰 마음을 먹고, 나무막대를 마당으로 다 빼서, 박아두었던 나사들을 모두 뽑고, 하나씩 수거하기 좋은 크기로 부러뜨려 큰 종이상자에 담았다. 두 시간 정도 작업을 하고 나니, 상자 세 개에 나무들을 모두 담을 수 있었다. 곰팡이꽃이 핀 나무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상자 속에 담겨 이별을 감당하고 있었다. 

 

아주 멋진 울타리를 만들었어요. 라며 그 나무들을 처음 보여주었던 이는 이제 다시 만날 수 없을 사람이 되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나무막대의 마디를 무릎에 대고 부러뜨릴 때마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야속함을 생각했다. 비단 한 인연만이 아닌, 삶 속의 모든 끊어냄의 통증들을 생각했다. 

 

나무들이 담긴 상자를 분리수거장에 내어놓고 돌아와 꾹 닫힌 창고를 보니 달리 보였다. 이제는 오래된 나무가 잠들어 있지 않은 창고였다. 비어내지 않으면 담을 수 없고, 떠나지 않으면 다른 길을 만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을 담고,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라면 우리는 늘 병든 수도승이나, 영원한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 삶의 순수한 종착역은 오직 죽음이니, 그 앞에 많은 간이역들을 놓아야만 삶은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포장도 없이 하얀 선물들이 마당에 쌓여 있었다. 하늘과 세상이 점점 백지가 되어 가는 중이다. 묵은 것을 이제야 정리한 게으름에 대하여 과한 선물이자 응징이다. 이제 나는 저 백지 위에 무엇을 써야 할까. 병든 수도승이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2020. 12.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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