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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라디오와 다락방

멀고느린구름 2020. 9. 17. 08:16

 

라디오도 좋고, 다락방도 좋다. 두 단어 모두 무척 사랑하는 단어다. 두 가지가 조합이 된다면 최상일 것이다. 내 생애 최초의 개인방은 다락방이었다. 단언컨데 내게 다락방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락방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중학생 무렵, 나는 다락방의 알전구가 희미하게 비추는 주황빛 속에서 방과 후의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빨간 라디오의 안테나를 창 밖의 바다로 향하고, 디제이가 선곡해주는 발라드와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즐겨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종종 피터팬이 되는 상상을 했고, 인형 친구들과 세상에 없는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초딩시절의 풋사랑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쓴 문장에서 라디오를 뺀다면 음소거를 한 뮤직비디오 같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며칠 전 라디오 기능이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구입했다. 60년대의 전축 같은 디자인이다. 다락방 침실의 머리맡에 두었다. 덕분에 오래 전의 그날들처럼 잠들기 전 에프엠 채널들이 나란히 놓인 음악의 밤거리를 거닌다. 주로 들르는 단골 가게 두 곳은 클래식 채널과 올드팝 채널이다. 오랜 세월 여기저기서 구해둔 빈티지와 엔틱 제품이 가득한 다락방에서 옛 음악들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나로 멈춰 있는데, 세월만 깜박 열어둔 수돗물처럼 콸콸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어린시절 다락방에서 피터팬 놀이를 한 탓에, 다락방의 통로 속만 지나면 피터팬 콤플렉스의 기습에 무방비 상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곳도 다락방 휴게실 쪽의 창가다. 바람에 벌써 겨울이 10% 섞여 있다. 커피가 빠르게 식는다. 침실에 켜둔 라디오에서 이름 모를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왈츠를 사랑한다. 나의 인생이 음악이라면 종종 가을아침의 왈츠 같은 것이기를.

 

2020. 9.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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