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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외로움이 습기 속에

멀고느린구름 2020. 8. 27. 07:48

외로움이 습기 속에 가득한 어제였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창문을 꼭꼭 닫아두고 있느라 집안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오후의 열기로 가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자 새어들기 시작한 습기로 실내는 그야말로 열대우림 같았다. 창문을 열고 사용해야 하는 작은 에어컨 남극이도 태풍 탓에 사용불가였기에, 나는 고스란히 아마존의 전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선풍기에 의지해 재택근무용 업무를 마치고 나자 공연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때로 외로움은 짜증으로 온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게임기를 켜서 축구게임을 했는데, 손흥민이 제대로 골을 넣지 못하고 경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모르긴 해도 내 비명 소리에 같이 사는 반려인형들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유행하는 앱을 이용해 만난 적 없는 사람과 대화를 나눴는데, 오히려 점점 더 쓸쓸해지기만 했다. 전기 신호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소통하는 일이 이제는 좀 지긋지긋하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존재하며 서로의 실체를 두고 전하지 않는 말들은 모두 공허하게 느껴진다. 커피를 내려 마시는 일도, 밤 공기에 걸맞는 음악을 듣는 일도, 보고 또 본 인테리어 책을 뒤적거리는 것도 다 따분해져서 그만 집안의 모든 불을 끄고 다락방에 올라 눅눅해진 요 위에 누워버렸다. 바람이 작은 창을 요란하게 흔들고, 희미하게 풍경 소리가 들려왔다. 이적의 '사랑은 어디로'를 듣고 싶었으나, 듣지 않았다. 윤상의 '사랑이란'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역시 듣지 않았다. 

 

삶이 끝난다는 것은 더 이상 무엇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삶이 끝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끝난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습기 속에 외로움이 너무 많은 탓에 어젯밤 나는 잠시 시체가 되었다. 오늘 이렇게 부활하여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좀비일까, 다만 쓸쓸한 생물일까. 

 

2020. 8. 2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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