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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작별의식

멀고느린구름 2020. 8. 23. 09:19

사랑이 동전이라면 뒷면에는 늘 영원한 이별이 새겨져 있다. 우리 모두 영원히 앞면만을 보며 살겠노라 마음 먹지만, 사랑의 시절 속에서 때때로 동전의 뒷면을 슬쩍 훔쳐보다가 결국 어느 날 동전을 뒤집고 만다. 혹은 동전을 뒤집어두고 떠난 사람을 망연히 바라보게 된다.

 

내게 남겨진 동전의 뒷면을 외면하며 1년을 보냈다. 주말에 열차를 타고 먼 고장을 다녀왔다. 처음으로 '우리'가 되었던 날 거닐었던 그 거리와 천변을 혼자가 되어 다시 걸었다. 내 삶에도 사랑의 계절이 몇 번 있었다. 결과만 두고 본다면, 사랑이란 모든 생명은 결국 영원한 혼자로 돌아간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유년의 빛나던 순수도, 학창시절의 드높던 꿈도 계절의 순환 속에서 스러지고 지금 여기 남은 것은 오직 혼자인 나뿐인 것처럼. 

 

나는 언제나 좋은 연인이 아니었다. 사회문제에 대해 떠들고 까부는 것에 비해 인격의 완성도는 늘 초라했다. 다정한 사람을 꿈꾸었으나, 타고난 피는 차가웠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고 싶었으나, 내 속은 골목길처럼 좁고 어두웠다. 우리로 걸었던 밤의 천변을 혼자 거닐며 아주 사소한 날들을 떠올렸다. 청춘일 때는 모든 날이 청춘이지만 아주 가끔씩만 청춘임을 자각한다. 우리가 사랑 속에 있을 때도 모든 날이 사랑임을 알지 못한 채, 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것을 내버려둔다. 그 시절 우리가 만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 날들의 며칠이라도 빌려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전의 뒷면을 내려다보며 이제는 동전의 앞면을 훔쳐보고 있다. 

 

천변의 끝자락에서 캄캄한 허공을 올려다보니 두 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흐리고, 하나는 빛났다. 빛나는 쪽이 당신이라고 생각했다. 별들의 사이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떨어져, 두 별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의 끝이 그 별들과 같은 것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여름의 태양 속을 걸어 마주한 기억의 장소에서 조용한 작별의식을 가졌다. 수년 전의 시간이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튜브 클립처럼 손가락만 가져다 대면 언제든 재생될 것처럼 생생히.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돌아나오며 뒤를 돌아 당신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오래 바라보았다. 안녕.

 

2020. 8.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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