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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광주행

멀고느린구름 2020. 8. 8. 11:48

8월이 되면 광주에 다녀오겠다고 새해부터 마음 먹고 있었다.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날에 맞춰 휴가도 냈는데, 하늘이 돕지 않고 있다. 광주행 열차가 운행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아침 속보로 접하고, 멍하니 구름정원 거실에 앉아 권순관의 2집 앨범을 빗소리에 섞어 듣고 있다. 내일은 비가 좀 잦아든다고 하는데 부디 일기예보가 이번에는 맞기를 바란다. 

 

소중히 지키고 싶었던 기억을 조금씩 흘려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마음의 수문을 연다고 해서 그 많은 것들이 흘러가버릴 수 있을까 싶지만, 순리대로 천천히 해나가야 할 일이다. 

 

광주에 가면 깊은 밤의 천변을 걷고, 문이 닫힌 상점들 사이를 지나며, 빛이 희미하던 시절의 노래를 들으려 한다.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밟고 대나무 숲의 벤치에 앉을 때는 먹구름 사이로 연푸른 하늘이 비췄으면 좋겠다. 물이 불어나 출입금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호수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가 먼 구름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모든 일들을 의식처럼 행하고 나면 비로소 나는 다른 인생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벌써 아주 긴 세월 속을 살아왔다. 사랑보다 중한 것은 없다고 여겨온 나인데, 사랑에서 늘 가장 어리석었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더 나은 나라는 것은 어떤 나일까. 나는 언제나 답을 찾지 못한 채, 연거푸 질문만 던지며 살아오고 있다. 희미한 깨달음 하나는 질문보다 효과적인 것은 아주 작은 행동 하나를 고쳐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늘 완벽한 답을 먼저 찾고, 그에 따라 살고자 했다. 

 

그러나 온전하고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존재한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의 아주 작은 몇 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우주는 단지 그것뿐이다.

 

폭우 속의 광주행은 몹시 무의미하겠으나, 어떤 무의미는 우리의 먼 삶을 의미로 바꿀 것이다. 

 

 

2020. 8. 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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