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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여름이 온다

멀고느린구름 2020. 5. 14. 09:27

 

여름이 온다. 아직 날씨는 봄과 여름 사이를 오가고, 유행하는 감염병으로 인해 세상은 어수선하지만 예정대로 여름은 오고 있다. 사람의 인생에도 계절과 같이 어김 없이 찾아오는 예정된 것들이 있을까. 운명이라 부르는 사건, 인연이라 부르는 마주침. 살아오며 겪은 여러 사건과 마주침을 때로 운명이나 인연으로 해석하였으나, 실은 내 손에 내 인생 전체의 계획표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들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들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어쩌면 그것은 예정되어 있던 것들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거나, 그렇게 믿기로 마음 먹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온 우주가 몇 가지의 물리 법칙에 따라 이토록 성실히 예정된 것들을 꺼내놓는 모습을 대하면,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인간의 삶 또한 예정된 무엇이 나타나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진다. 일하던 직장에서 갑작스레 해직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고 지내던 분으로부터 책방 운영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사실상 수익이 전혀 없을 것 같아 며칠 고민하다가,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무보수 재능기부를 한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싶어 수락했었다. 그런데 행정절차상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다시 고민에 빠졌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인생은 뒤집히고, 엎질러지고, 꼬이다가 가끔 엉뚱한 곳에 나를 세워 놓곤 했다. 돌이켜보면 갑자기 대안학교 교사를 맡게 되었을 때도, 내 인생은 20대 최악의 순간에 봉착해 있었다. 그때 내가 교단에 서는 게 두려워서 물러섰다면 어땠을까. 

 

엉뚱한 얘기지만, 훨씬 높은 보수를 받는 중견기업의 착실한 사원으로 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의 행복과 보통의 고민을 누리며, 고향의 친척들이 명문대에 입학한 내게 기대했던 바대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다달이 넉넉한 용돈을 드리며 효자노릇을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한 인생이 무척 가치 있고, 또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내가 그 길을 가지 않은 것인지, 우주가 계획해둔 내 인생의 여름이 그 길 위에 있지 않았던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다. 어느 쪽이든 지금은 이 길의 여름이 오고 있다. 모든 계절은 익숙한 것 같지만 언제나 새롭다. 2020년의 여름은 2019년의 여름과 다르다. 미지의 여름이다. 미지의 여름은 오고, 나는 그 여름 속으로 걸어들어 갈 것이고, 우리는 어딘가에서 만날 것이다. 너무 덥지 않기를 바란다.

 

 

2020. 5. 1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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