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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커피는 한밤중

멀고느린구름 2017. 5. 13. 23:08



커피는 한밤에 마시는 것이 맛있다 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정확한 통계 수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엊그제 내렸던 커피가 정말로 맛있었던가 하고 떠올려보면 어쩐지 불확실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본래 '한밤의 커피'라고 하려다가, '커피는 한밤중'으로 전격 교체되었다. 아시다시피 커피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커피를 한밤중에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 수 있었던 연령대가 정확히 언제까지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히 서른셋 무렵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대안학교 교사회의를 마치고 집에 새벽에 들어와 커피를 내릴 새도 없이 곯아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까페 지점을 맡아 커피드리퍼로 온종일을 살았던 서른넷 무렵인가 하고 생각하면 하루 내내 커피를 마시고도 밤에 쿨쿨 잘만 잤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한밤중의 커피를 잠의 적으로 삼게 되었던가. 느닷없는 커피로 인한 불면의 증상이 노화와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연구를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으니 이런 소재로 '커피는 한밤중'이라는 글을 쓰고 나면 어쩐지 잠이 잘 올지도 모른다는 해변의 등대빛 같은 희망을 품었던 것 뿐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별로 효과는 대단치 않을 것 같다. 벌써 스무 해를 기념해야 할 정도로 오래 내려온 내 커피는 내공에 내공이 더해지고, 나에게 최적화되어 지나치게 맛있다. 어쩌면 커피가 지나치게 맛있어졌기 때문에 입안에 감도는 감칠맛에 감탄하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까. 커피란 것은 묘한 음료임에는 틀림 없다. 커피가 여행객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필시 커피가 우리의 마음을 모종의 여행자의 상태로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커피의 향을 맡고, 입안에 머금은 후 보드랍게 빙글 돌려보면 지구본을 돌리는 것처럼, 기억의 많은 장소들을 여행하게 된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과 함께 지금 커피는 한밤중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도무지 걸어갈 수 없는 별에게 걸어가듯 청춘의 기억들 속을 서성였다. 사랑했고, 이별했고, 소리쳤고, 침묵했고,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내렸다. 봄이 왔고, 봄이 갔다. 어떤 여름밤의 공기에서는 현기증이 이는 뭉클한 세제 냄새가 났다. 에피톤 프로젝트의 이름 모를 곡에서 기타 반주가 쓸쓸한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흘러나온다. 커피는 한밤중이고, 나는 한 모금의 커피를 더 들이켰다. 지구가 돌고, 기억이 돌고, 마음이 돈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다. 커피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2017. 5.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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