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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어쩌다가 지구에 출현했을까.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구가 태양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궤도에 우연히 위치했기 때문이다. 행성은 항성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끝없이 타오르는 별이 되고, 너무 멀어지면 모든 것이 얼어붙는 별이 되고 만다. 지구와 같은 조건 하에서 생명이 출현할 수 있다면, 다른 은하계 속에서도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행성이 항성에 대하여 지구와 같은 궤도에 있을 때 그 별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태양에 대하여 지구의 위치와 같은 균형 잡힌 궤도를 이름하여 '골디락스 궤도'라고 한다.
태양은 지구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제공해주는데, 그렇다면 지구는 태양에 대하여 무엇을 제공해주는 것일까. 우주의 법칙 중 하나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르자면 반드시 지구도 태양에 대하여 무언가를 주어야만 한다. 분명 물리학적으로 행성이 항성에 대하여 보상하는 것이 있겠지만, 나는 느닷없이 인문학적으로 사유하고 싶어진다. 태양이 지구에게 에너지를 준다면, 지구는 태양에게 마음을 준다고 말이다. 마음은 유기체를 이룬 생명의 것이다. 태양은 그 혹독한 환경 때문에 유기체를 잉태하지 못했고, 따라서 태양 속에는 마음이 없다. 태양계 내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마음을 지닌 별은 오직 지구 뿐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온전하게 지켜지는 것 또한 당신과 나의 골디락스 궤도 상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지나치게 다가가면 맹목적인 열정만이 가득하게 되고, 지나치게 소원해지면 차갑게 식고 만다. 기쁘고, 슬프고, 화가 나고, 쓸쓸해지고, 또 용기를 얻고, 안정감을 느끼는 그 모든 다양한 마음들은 내가 당신으로부터 골디락스 궤도 상에 있을 때만 생겨난다. 어떤 이들은 화가 나서 헤어졌다거나, 쓸쓸해져서 헤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사랑은 모든 마음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당신으로 인해 아무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
지구는 골디락스 궤도 상에 있기에 가장 아름답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태양은 지구에게 가장 반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명석한 사랑의 천문학자가 되어 상대로부터 골디락스 궤도의 지점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각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고, 영원한 마음을 지닌 채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며 맴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명석한 사랑의 천문학자가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잃고 골디락스 궤도를 이탈한다. 캄캄한 우주로 멀어지다가 어느 순간 또다른 항성의 중력에 이끌려 들어가곤 한다. 종종 우리가 항성이라고 믿었던 별이 빛을 잃고 먼저 골디락스 궤도를 이탈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차가운 얼음의 별이 되어 텅빈 우주 속에 홀로 남게 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아직 마음이 있다면, 기쁨 혹은 슬픔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서로 골디락스 궤도 상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사랑의 천문학자들은 이 궤도를 오롯이 지켜내는 비법을 밝혀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럴 거면 '골디락스 궤도'라는 멋있는 이름은 구태여 왜 붙였을까 싶다. 우리가 그 궤도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던 순간을 추억하기 위한 이름인 것일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눈을 감고 우주를 펼쳐 당신과 나의 골디락스 궤도를 그려본다. 이만큼일까. 혹은 저만큼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을 때 우주를 펼쳐 누군가와의 골디락스 궤도를 그려보게 된다면, 분명 아직 그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겠지. 적어도 그리운 항성 가까이 뜨거운 별이 되어 있는 것이겠지.
2017. 5.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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