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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스위트피의 섬으로 가는 푸른 배

멀고느린구름 2017. 5. 17. 22:58


"아사꼬는 스위트피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피는 아사꼬 같은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을 떠올리면 자연히 '인연' '아사꼬', 그리고 '스위트피' 연달아 온다. 인연을 떠올리고, 어느 봄날의 아사꼬를 잠시 불러 만나고 나면, 마지막은 스위트피의 차례다. 스위트피를 만지려고 손을 내밀면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씨의 솔로 프로젝트인 스위트피의 음악이 생각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곡은 ''이었다. 비록, 작사와 작곡은 재주소년이 것이지만 가창부터 스위트피에게 맡겨진 곡이었기에, 내게는 여전히 스위트피의 곡으로 남아 있다. 


피천득 선생과 아사꼬, 그리고 스위트피와 섬이 나란히 마음 속에서 일렬로 배열이 되는 날이 있다. 마치 월식이나 일식의 날처럼 말이다. 그런 때면 푸른 배를 스위트피의 섬을 향해서 띄울 있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가에는 어스름한 안개가 자욱하고, 나는 홀로 노를 젓는 푸른 배를 타고 보이지 않는 섬으로 있다. 바로 스위트피의 섬이다. 스위트피의 섬에는 오직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비밀스런 연서들이 봉인된 안도 다다오풍의 네모난 단층 콘크리트 건물이 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커피를 내리고, 직사각형의 투명한 창으로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하는 바다를 바라본다. 서향이기에 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햇빛의 냄새 만이 자욱하게 풍겨올 . 진한 커피의 향과 어디선가 세안를 하고 나온 해의 새물내는 나쁘지 않게 어울린다. 나는 서랍 속의 연서들을 꺼내지 않고, 속에 넣어둔 채로 읽는다. 어느새 그리움이 목까지 차오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안도 다다오풍의 네모난 단층 콘크리트 건물을 빠져 나온다. 그리고 조용히 푸른 배의 노를 저어 스위트피의 섬을 떠난다. 


인연도, 아사꼬도, 스위트피도 아주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는 것을 그때는 없었다. 청춘을 너무 쉽게 꺾어버린 나는 가끔 스위트피의 섬에서나 그네들을 비밀스레 만난다. 그것도 월식이나 일식의 같은 때에만 가능하니, 이는 인생이 내게 가한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위트피의 섬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이는 인생이 내게 내린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플러스마이너스 제로다. 어쩌면 모든 것이 전부. 


2017. 5.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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