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째 날 마지막 글이다. 간신히 눈을 떠서 손가락에 남은 힘을 모으고 있다. 지금이 여전히 어제인지 다음날인지조차 확실치 않구나. 모텔의 암막창은 굳게 닫혀서 빛 한 조각도 허용하지 않아, 밤인지 낮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어쩐지 그것이 이 아빠가 살아온 인생이었던 것만 같구나…. 네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너는 기묘하게도 그 사람의 모습을 닮아갔다. 나는 그것을 그 사람이 세상에 원(怨)이 남아 너를 통해 내게 호소하려 한다 여겼다. 너를 아끼는 한 편, 너 이외의 것은 아끼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곳에 와서 그 사람과 만났던 곳을 걷고, 그 사람의 일들을 다시 떠올려 보니… 내가 오래 착각해왔던 것은 아닌가 싶구나. 이제서야. 이제서야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의 원을 풀기는 커녕 되려 나라는 사..
여섯째 날 딸아, 손아귀에 좀처럼 힘이 주어지지 않는구나. 펜을 들어 글씨를 쓰는 일조차 온 힘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아주 늦잠을 자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알뜰하게 쓰고 싶었는데 말이다.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떴다. 하마터면 눈을 못 떴을지도 모를 일이니… 그렇게라도 깨어난 것에 감사해야겠구나. 커튼을 열어보니 햇살이 정말 눈부셨다. 햇볕이란 것이 이토록 따스하고 환한 것이었는지 미처 알지 못하고 살았다. 해변으로 나가 좀 걸었구나. 그 사람과 함께 어머니의 유골을 떠나보낸 곳에 섰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마치 그 사람의 손길 같았다. 그리웠다. 그 사람뿐만이 아니다. 모든 지나간 것들. 잘못 보낸 시간들. 내가 내 스스로 망쳐버린 아름다운 순간들. 어린 ..
다섯째 날 사랑하는 딸아, 다시 날이 밝았다. 그리고 아빠는 아직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신은 아직 내게 이 이야기를 끝마칠 기회를 주려는 것 같다. 그래, 끝마쳐야겠지. 나는 지금 어제와는 다른 숙소에 있다. 창을 열면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야. 오늘 아침 일찍 동해로 옮겨 왔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다. 이 해변은 네 엄마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네 엄마가 한 번 와보고는 반해서 여름이 될 때마다 오자고 조르던 곳이란다. 하지만 네 엄마와 오기 전에는 그 사람과 처음 이곳에 왔었다. 딸아,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안다. 아냐, 그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경멸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랑하던 이의 타락과 추악은 무엇보다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지. 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목격하..
넷째날(3)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서서히 의식이 사라지는 느낌에 익숙해지려고 하고 있단다. 죽음도 이리 잠드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샤프를 쥔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그리고 손목이 저리다. 눈은 침침하고. 글을 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구나. 아주 간단히 쓰려고 했다. 그래, A4 용지 한 장 정도로 쓰려던 이야기였다. 헌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이리도 많은 말들이 빽빽하게 종이를 채우고 있다. 이제 그 사람과 세번째로 만난 주말에 대해 쓸 차례구나. 주저스럽다. 네 엄마와 연애담이라면 차라리 나을 테지. 하지만 네가 그간 듣도 보도 못한 외갓 여인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네게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이 기억이 나에게서 누군가에게로든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넷째날(2) “누… 누구시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느닷없는 내 물음에 놀란 그 사람은 우산을 쥔 오른 손에 왼 손을 모으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합장을 한 거다. 당시 나는 승복차림이었으니, 아마 머리를 기르는 법사겠거니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영주에 조그만 의복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입니다. 제 행색이 너무 누추해서.. 부처님 앞에 누가 된 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대뜸 사과부터 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본 목소리가 다소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 내가 화를 내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기왕 법사 흉내를 낸 김에 그 사람의 이름이며, 나이며, 영주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이며 하는 것들도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 사..
넷째날(1) 딸아, 오늘은 약속대로 너에게 조금 어처구니 없고, 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려한다. 네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식사를 하는 식탁에서 그 일을 고백했을 때 아빠는 그저 놀라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네가 진보정당의 청년당원이 되어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속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되리라고 여겨 마음의 채비를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 네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일 거야. 네 엄마와 혼인은 했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너를 뱃속에 품게 되었고, 결국 네가 태어났지. 무정한 아빠는 네가 태어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키지도 않았구나. 네가 태어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출장에서 돌아와 너를 보았다..
셋째날 딸아, 오늘은 특히 피곤하구나. 무리해서 산행을 한 탓이겠지. 아무튼 아빠는 약속을 지켰다. 부석사에 다녀왔단다. 시외터미널에서도 한참을 버스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어릴적부터 종종 다녀오던 곳이었단다. 나는 공대생이었지만 아주 잠깐 고시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곳 부석사에 방을 하나 얻어 기거한 적도 있었어. 아들이 고시 공부를 하겠다니까 할아버지는 무척 신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고작 2개월만에 하산해버렸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2개월의 시간은 내 마음 속에 뚜렷한 기억을 남겼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사람에게는 꼭 하나씩 있게 마련일 거다. 네게도 그런 기억이 있을까. 없다면 아마도 언젠가 그 기억이 너를 찾아 올 게다. 부석사 버스정류장..
둘째날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컷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읍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 가는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읍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푹리를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읍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대 왜 현 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