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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7일 - 넷째날(1)

멀고느린구름 2012. 1. 27. 10:39



넷째날(1)



  딸아, 오늘은 약속대로 너에게 조금 어처구니 없고, 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려한다. 네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식사를 하는 식탁에서 그 일을 고백했을 때 아빠는 그저 놀라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네가 진보정당의 청년당원이 되어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속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되리라고 여겨 마음의 채비를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 네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일 거야. 


  네 엄마와 혼인은 했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너를 뱃속에 품게 되었고, 결국 네가 태어났지. 무정한 아빠는 네가 태어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키지도 않았구나. 네가 태어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출장에서 돌아와 너를 보았다. 너를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 까닭은 오직 나만 아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너는 그 사람을 닮게 태어났다. 그네의 재 한 줌이라도 네 속에 스민 것일까….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나는 그제서야 너를 사랑스런 여인으로 키워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처음의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너는 자라날 수록 그 사람의 얼굴을 꼭 닮아갔다. 집안에서는 아들을 하나 더 보아야 한다고 성화였지만, 나는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아빠에게는 오직 너만이 중요했다. 너를 아름답고 훌륭한 여인으로 키워내는 것만이 속죄의 한 길이라고 여겼다. 부족함 없이 자라게 하고 싶었다. 뜻하는 것은 무어든지 이뤄주고 싶었다. 


  아빠는 돈을 통해, 재산을 쌓아 내 속의 허허로움과 너의 원을 채우려 애썼다. 하지만 어쩐지 너를 채우려 하면 할 수록, 네 바람을 남김없이 들어주려 하면 할 수록 너는 비어져 가는 것 같았다. 너는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네 엄마의 삶으로부터 빈 마음을 채우려 하는 것 같았다. 엄마를 미워하지 말거라. 누구보다 너를 낳고 싶어했고, 너를 사랑으로 키운 엄마다. 네가 중학생이 되던 그해에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모든 것은 다 나의 죄로구나. 


  방이 너무 갑갑한 느낌이 들어 커튼을 걷고, 창을 조금 열었다. 밖에는 모르는 사이 비가 오고 있구나. 자신 속에 갇혀 있으면 남의 마음에 비가 오는지도 모르는 게 사람이다. 먹구름이 끼었는지도, 어디서 태풍이 닥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 사람이다. 빗소리가 좋구나. 아, 그 날도 비가 오는 날이었구나. 


  1970년 9월. 여름방학 기간이 끝나 캠퍼스가 있는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중도에 내리고 말았다. 버스에서 듣게 된 라디오 방송 때문이었다. 어린 여공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의 사연이었다. 어머니의 딸은 하루에 19시간을 일하고 5시간을 집에서 잠을 잔다. 주말에도 동일하게 일을 한다. 그렇게 해서 병든 어머니의 약값도 벌고, 오빠의 학비도 댄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은 어머니에게 조그만 옷 한 벌을 선물한다. 어머니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돈이 어디서 났냐고 묻자 딸은 답한다. 한 달간 밥을 굶어 돈을 모았다고. 디제이는 참으로 감동적인 사연이 아니냐고 감격한 체를 하며 선물로 영화 티켓 두 장을 선물했다. 거기까지 듣고 나는 버스에서 내릴 결심을 했단다.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나는 그런 고민에 빠졌다. 대체 영화티켓을 선물한들 두 모녀가 영화를 보러 갈 겨를이 있겠느냐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노동운동에 하나 둘 가담하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허나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시대의 앞에 서야겠다는 모종의 허영심이 생겨났다. 스물 세 살의 내가 생각한 것은 사법고시였다. 대부분 세상을 바꿔보겠노라고 출사표를 던지던 청년들이 유행처럼 그리로 몰리고 있었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그 유행에 동참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앞서지 않았나 싶구나. 그저 즉흥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부석사로 들어가 선방에 틀어앉았다. 인근 서점에 들러 산 현암사본 법전 한 권만이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제법 착실하게 법전을 읽어내려 갔으나 이내 질리고 말았다. 아무런 체계도 구체적인 목표도 없이 그저 법전을 읽기만하는 공부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답답하고 무료한 마음에 절간 곳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무량수전 한 켠에 쌓여있던 금강경 한 권을 집어와 읽기도 했다. 그도 따분해지면 조사당 쪽 뒷산으로 올라가 멍하니 아랫세상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부석사에 온지 일주 째 되던 일요일이었다. 그 날도 조사당 앞 마당에 아무렇게나 앉아 네 할머니에게 청해 얻은 책을 읽고 있었다. 김승옥의 <1964년 서울>. 물론, 오늘날 서울의 현실을 알아보기 위함이라는 핑계를 붙여 얻은 책이었다. 책 위에 갑자기 빗방울이 하나 둘 듣기 시작하더니 와하고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조사당 안쪽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고 가만히 비를 바라보고 있으니 배가 고팠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정오였다. 공양할 시간이 되었지만 빗줄기가 워낙 거세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비탈 아래 쪽에서 싸구려 비닐 우산 하나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푸른 비닐 우산은 내가 있던 조사당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우산을 같이 얻어 쓰고 갈 요량으로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비도 이렇게 오는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그렇게 물었고, 그 사람은 우산을 바투 올려들고는 내 얼굴을 확인했다. 나도 들려진 우산 아래 드러난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인이었다. 내 또래 즈음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행색은 초라했다. 허나 그 얼굴은 내가 여태 듣도 보도 못한 미모였다. 가슴이 빗방울처럼 뛰었다. 그 사람과의 첫 대면이었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이렇게 가슴이 뛰는구나. 이제는 낡고 못 쓰게 된 심장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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