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스스로 꿈꾸고 있는가 책이 참 곱다. 새로나온 책들의 더미에서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감격했다. 곧 책을 둘러싼 갖가지 미사여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출신의 학자가 독일의 철학계를 발칵 뒤집었다는 것이 수많은 미사여구들의 집결점이었다. 당시 한국 독서계는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마이클 샌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을 법한 사람도 그가 '하버드대 교수'이며, '전설적인 하버드대 명강'을 펼쳤다는 정보를 통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친근감을 표했을 것이다.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을 신비주의적인 시각으로 왜곡해서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를 지적하며 제시한 '옥시덴탈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지음/아포리아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크라잉 넛 멤버들이 함께 썼다는 책 를 읽고 싶어졌다. 그들에게 책의 제목을 빚졌다는 유시민 전 의원의 를 읽은 후부터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니 이제 차츰 '전 의원'이나 '전 대표'라는 호칭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스러져 갈지도 모르겠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 후보 흔들기를 하던 후단협에 분노해 개혁당을 창당한 것도 벌써 10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은 정치적으로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인 유시민은 정치인 유시민이 되어 그 시간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있었다. 한때 야당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지니기도 했던 그였기에 정계은퇴 후 나온 첫 책에 대해서도 많은 언론들은 그가 책에 언..
외딴방 - 신경숙 지음/문학동네 "누가 심었을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배추는 자란다. 자라기만 할뿐 속은 차지 않는다. 푸른 배춧잎에 공장의 검은 먼지가 쌓여 있다." -244p- 나는 매니악한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노희경씨의 작품은 잘 보지를 않는다. 얼마 전에 아버지댁에 놀러갔다가 아버지가 커피프린스 1호점을 즐겨보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어보니, 아버지 역시 삶 자체가 힘겨운데 너무 힘겨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드라마를 보는 건 괴롭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냥 걱정없이 돈도 펑펑 쓰고 화면 예쁘고 배우들 예쁜 드라마를 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내가 윤석호류의 드라마를 좋아하나보다. 사실, 노희경씨가 그리는 밑바닥 인생의 이야기들은 직접 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삶을 겪어온 사람들이 ..
새 - 오정희 지음/문학과지성사 새장 속에서 윤회하는 우리들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는 새의 그림에 반했다. 새를 갑갑하게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네모 칸들이라든지, 붉은 색으로 촌스럽게 새겨져 있는 제목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새." 라고 제목을 발음하며 시집 크기의 이 소설책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꼭 작고 흰 새를 들어 올린 듯한 느낌이었다. 표지의 그림은 돌아서려는 나의 몸을 자꾸만 잡아 당겼다. 나중에 그 그림이 그 유명한 피카소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종종 책의 내용보다 표지가 마음을 끄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 표지의 아름다움을 글이 뛰어넘지 못하면 실망이 배가 되곤 했다. 비록 유명하지 않은 소묘작품이..
티티새 -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불이 꺼지고, 이 병실이 거대한 어둠이 되면 정말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 울고 싶을 정도다. 울면 지치니까, 어둠을 견디는 거야." "하지만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면, 햇살과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 나는 아직도 절반쯤 감은 눈, 호나한 눈꺼풀 속에서 꾸벅꾸벅, 개와 산책하는 꿈을 꾼다. 내 인생은 형편없었어. 좋은 일이라고 해봐야,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 바닷가 마을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잘 있어." 일본 현대 작가 중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요? 라고 소개팅 자리에서 누가 물어봐준다면 요시모토 바나나 씨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상대방은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서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 파묵의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쓴 소설 창작론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파묵의 본서 가 하버드대학교에서 그가 한 특강의 강연록인 점, 창작론의 내용이 일정한 보편성의 범주에 포함되는 점 등을 든다면 다소 작가 개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라도 한 마디 쯤 거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하버드 마케팅은 비단 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책 판매 전략 중 하나다. 오르한 파묵의 이번 강연록이 번역되어 나온 맥락도 그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일종의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1등 대학의 이미지, 천재들만 가는 최고의 교육기..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열린책들 우리는 누구나 유년을 지나 어른이 되고, 저녁이 되면 석양이 지는 것을 함께 바라본다 어느 날 서점에 갔더니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표지로 한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가 쓴 라는 책이었다. 모노크롬으로 된 사진 속의 여성은 많은 사연을 담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책을 열어보지는 않고 그 사진만 한참을 들여다보다 자리를 옮겼다. 얼마 후에 서점에 갔더니 같은 사진인데 이번에는 세피아빛깔이다. 제목은 라고 쓰여 있었다. 제목과 표지가 자아내는 아련한 느낌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책 날개의 저자에 대한 소개를 읽어보다가 약속 시간이 되어 서점을 서둘러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가 나에게 선물로 책을 두 권 건냈다. 놀랍게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저자김연수 지음출판사문학동네 | 2012-02-20 출간카테고리소설책소개“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 프로 소설가다.” ‘프로 소설가’...글쓴이 평점 2009년에 출간된 김연수 작가의 단편집에는 동명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다시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제목의 이 단편은, 제목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풀어지는 이야기, 한국과 일본을 넘나드는 정서, 붉은 노을과 하늘을 가르는 두루미 떼의 정경은 한 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그 소설을 읽을 때에는 세계적으로도 흰두루미가 많이 찾아온다는 철원에 있었다. 거기다가 핵심 철새 도래지인 DMZ 부근에서 장교로 복무할 때였으니 책의 이미지들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었다. 오랫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