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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는 문장들
"1650년 봄, 생트 콜롱브 부인이 죽었다. 부인은 두 살과 여섯 살 난 두 딸아이를 남겼다. 생트 콜롱브 씨는 아내의 죽음이 사무쳤다.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 그가 '회한의 무덤'을 작곡한 것은 아내의 죽음 때문이었다."
즐겨 보는 케이팝스타 시즌 4에서 박진영 심사위원은 음악의 첫 소절을 듣고 딱 마음에 들어맞으면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끝났네 끝났어"라고 말하곤 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을 모두 읽은 뒤, 위에 인용한 첫 문단을 다시 읽어보면 똑같이 감탄할 수밖에 없다. 끝났네 끝났어.
중학교 1학년 즈음이었던가. 어머니가 비디오 대여점 점원으로 일하신 때가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은 집 바로 앞에 있어 종종 놀러가곤 했다. 취향이 좀 독특했던 나는 유럽권에서 만들어진 고풍스런 분위기의 영화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의 어느 하루. 자연스럽게 외화 코너의 유럽 영화들을 하나씩 뽑아서 케이스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쏙 드는 제목을 발견했다. '세상의 모든 아침'. 손을 뻗어 테이프 상자를 꺼냈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집어넣고 말았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강가에서 옷을 벗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전면에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주변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다시 꺼내 감정사처럼 제품을 면밀히 검토했다. 아름다웠다. 선연한 붉은 색으로 표시된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는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더욱 쿵쿵거리도록 만들었다.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도 좋았다. 그러나 숫기도, 용기도 없었던 열 네 살의 나는 그저 그 표지와 제목, 인상만을 가슴에 새긴 채 뒤돌아서야 했다.
그로부터 십 여년이 흐른 뒤에야 서점에서 <세상의 모든 아침>을 다시 만나게 됐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도, 나신의 여인도 없었지만 고즈넉한 아침 강가를 묘사한 표지는 추억의 빛을 바래지 않게 할만큼 아름다웠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작년이다. 안암동의 '좋은커피'라는 까페에서 손내림 커피를 만들어 손님께 내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때다. 고전적인 인테리어의 까페 안에 앉아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이 책을 읽었다. 개운사라는 절의 돌담이 바라보이는 커다란 통유리벽으로 오후의 햇살이 가득 비껴들고 있었고, 나는 숨을 죽인 채 책장을 넘겼다. 한 장을 넘기고, 다음 장을, 그리고 다시 다음 장을.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빠르게 다음 장으로 다음 장으로 건너갔다. 달려가고, 멈추고, 아름다움에 취했다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가, 다시 텅빈 숲에서 작은 새의 지저귐을 듣는 듯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이것은 글이 아니다. 연주다. 문장들이 이어지며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책을 읽은 것은 작년이지만 이렇게 감상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한 해가 지난 뒤다. 이 작품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무래도 누가 될 것 같다는 생각 탓이다. 돌이켜봐도 지금까지 여러 작품을 읽은 중에 이 작품처럼 온전한 작품은 얼마 없다. 분명 번역을 담당한 류재화 씨에게 상당한 공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쪼록 읽어보시길. 그리고 다시 한 번 첫 문단을 읽고. 표지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길.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 속에 그려지는 아침을 만나보시길. 그 풍경 속에서 하나의 음악이 들려온다면 이 작품의 진미를 맛본 독자일 것이다.
2015. 3. 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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