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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저자
#{for:author::2}, 도련님#{/for:author} 지음
출판사
현암사 | 2013-09-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 천년의 문학가 나쓰메 소세...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어째서 나쓰메의 작품은 오늘에도 



내가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첫 작품은 역시 『마음』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제 어느 때, 어떤 경로를 거쳐 읽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장 곤란한 점은 내가 스스로 이 책을 꺼내 읽은 것인지, 혹은 친구의 권유에 의해 읽게 된 것인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몇 번이나 돌이켜보았지만 결판이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아무래도 안전한 길을 택하는 쪽이 좋겠다. 오래전 만나던 한 친구가 손에 꼽던 작품 중의 하나가 『마음』이었고, 나는 그 친구의 영향으로 『마음』을 읽게 되었다고 말이다. 


『마음』은 이런저런 평가를 내려두고서라도 무척 재밌는 소설이었다. 나로서도 손에 꼽는 작품의 목록을 갈아치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두 번째로 읽은 나쓰메의 작품은 『한눈팔기』 였다. 이 또한 재밌었다. 이렇게 되면 세 번째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도련님』이었다. 아, 이 또한 재밌다. 『마음』이 만루 홈런이라면, 『한눈팔기』와 『도련님』은 만루 안타 정도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에게 일종의 경외감을 지니게 되었다. 어떻게 한 작가가 이렇게 줄곧 재밌는 작품들을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일본문학사에서의 위치를 떠올리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일본 근대문학사의 제일 첫 페이지에 놓인다.)

그는 1867년생으로 첫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것은 1905년이다. 38세 무렵부터 작품 발표를 시작한 것이다. (나도 아직 완전히 늦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소설가로 평가 받는 이광수 선생이 첫 장편『무정』을 출간한 것은 1918년의 일이다.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13년이 흐른 뒤다. 외람되지만 『무정』의 완성도나 재미는 나쓰메 소세키가 쓴 어떤 작품들보다도 떨어진다. 게다가 이광수 선생은 지독한 친일 행위를 일삼았으니 작품을 떠난 개인으로서도 그닥 호감이 가지 않는다. 아마도 인기 투표 및 인지도 투표를 하면 런닝맨에 출연하고 있는 이광수 씨와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날 것이다. (한국 소설의 선구자로서 이보다 비참한 결과가 있을 수 있을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오늘에도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심지어 최근 현암사에서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발간하며 파격적으로 아름다운 표지 디자인을 선보였고, 전권 양장본으로 발행하고 있다. 이광수 선생은 두고서라도 내가 존경하는 황순원 선생님의 전집도 90년대 초의 음... 이라고 고민에 빠지게 만드는 디자인을 20년째 바꾸지 않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동시대에 작품을 낸 이광수 선생의 작품은 오래된 중고서점의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저승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이광수 선생을 위해 한 가지 변론을 해드릴 수는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번역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당연히 일본어로 작품을 썼다. 아마도 일본 독자들은 1905년의 일본어를 곧바로 읽으며 1905년의 나쓰메를 감지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독자들은 다르다. 나쓰메의 1905년 일본어는 항상 현대의 한국어로 새롭게 갱신되어 번역된다. 요즘 불고 있는 세계문학전집 판매의 붐은 이 '번역'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헤르만 헤세, 셰익스피어, 단테가 모두 동일한 현대어로 현대의 독자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형태로 시대를 건너 뛰어 번역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1918년에 발간되어 한국어로 쓰여진  『무정』보다 1906년에 일본어로 쓰여진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 더욱 친숙한 '한국문학'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건 참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어로 쓰여진 작품들을 다시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해야한다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이광수 선생의 언어는 100년 전의 언어가 되었다. 이것을 현대의 독자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홍길동전이나 장화홍련전을 원문 그대로 읽으라고 출간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물론,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인기 있는 것은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즐거움'과 '유익함'이 강렬하다는 것이 가장 큰 인기의 비결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 근대 문학이 외국문학과 경쟁하는 데 있어서 공정한 출발선에 있지는 못하다. 언어는 소설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언어의 시대 불일치 문제는 우리 고전이 상대적으로 외면 받는 한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는 출판사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도련님』을 읽고 글을 쓰면서 정작  『도련님』 자체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를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작품에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이 질문들에 명쾌한 답을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감촉마저 아름다운 양장본 책을 오른 손에 들고 왼 손으로 책장을 사락사락 넘길 때마다 그저 가슴이 떨리고,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며, 마치 내가 1906년의 일본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이 소설에 대해 아직은 어떤 말도 감히 덧붙이지 못하겠다는 말만을 남겨둔다. 다음을 기약하며. 


2015. 4. 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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