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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일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절모를 혐오하는 여자 중의 한 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 그러니까 지금의 남편 역시 처음에는 혐오의 대상 중 하나였다. 그는 중절모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좋지만 딱 두 가지 결점이 있어, 하나는 나이가 상당히 연상, 두 번째는 건망증이라는 소개를 지인에게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생일선물을 잘못 사오는 남자이며, 중절모까지 쓰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모 관광호텔 카페의 소개팅 - 이라고 쓰고 맞선이라고 읽는 게 정확 -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멀리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려 호텔을 나가려고 했었다. 주선자가 레슬링 기술까지 써가며 나를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가 내 남편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 간단한 호구조사를 하다가 주선자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었다. 


“앞으로 다시는 중절모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제가 말씀드린다면 들어주시겠어요?”

“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였고, 그는 그 대답과 즉시 중절모를 구겨서 가방에 넣어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 이 남자라면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 걸어갈 수 있으리라고 결정지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주선자의 말처럼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단 한 가지 매번 내 음력 생일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만 빼고는. 한 번은 새해 첫날에 그에게 달력을 선물하며 그해의 내 생일에 붉게 동그라미를 쳐준 일도 있고, 그의 휴대폰에 내 생일 하루 전에 알람을 다섯 번이나 울리도록 설정해놓은 일도 있었다. 그는 내 생일 일주일 전에 달력을 찢다가 실수로 2개월치를 동시에 찢어버렸고, 휴대폰은 출장을 간 오키나와의 여관에 놔두고 와버렸다. 차마 당일에 오늘 내 생일입니다 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할 수가 없어서 연애를 시작하고 4년 동안 단 한 번도 제 날에 선물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결혼 후 처음 맞는 올해도 마찬가지 일 것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이 내 생일이고, 그는 멀리 북간도에 있기 때문이다. 


무역업을 하는 그에게 건망증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승승장구로 승진을 해서 회사의 어떤 일이든지 그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정도로까지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급기야 그는 북간도의 각 교육기관에 한국문학전집을 판매하는 일까지 앞장서게 되었다. 북간도의 교육기관장들을 한참 설득하고 있을 그가 갑자기 서울로 순간이동 할리가 없다. 그러나 묘한 기대감이 아침부터 가시지 않고 있다. 며칠 전 남편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번 생일에는 꼭 정확하게 선물을 줄거야. 그리고 한 가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될 비밀이 있어.”


나는 몇 번인가 은근슬쩍 비밀의 단서를 흘리도록 유도해보았지만, 그는 보안에 철저했다. 벌써 거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은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다. 작년에 그가 선물해준 카펜터스의 1집 음반을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와 12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만큼 그의 취향은 상당히 올드했지만, 되려 그런 점이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시침과 분침이 나란히 숫자 10에 멈춘다. 그리고 초인종이 울린다. 운명의 순간을 알리는 알람처럼. 전자 잠금장치의 디스플레이 창에는 중절모를 쓴 남편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불현듯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던 어떤 남자의 모습이 뇌리에 스친다. 그는 누구였더라. 멍하니 있는 내게 남편은 담담히 문을 열어달라고 재청한다. 문을 연다. 문 저편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하다. 어둠으로부터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가 걸어 들어온다. 



2014. 9. 2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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