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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예 잔디밭 위에 드러누워 귤빛으로 물든 구름을 바라보는 남자친구를 내려다본다. 결국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더이상의 로맨스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생일 선물을 매번 잘못 사오는 남편과 살게 된다. 그는 결혼기념일을 잘못 기억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완전히 잊어버리고는 되려 그런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자신과 결혼했냐고 호통을 쳐서 나를 울린다. 그날 나는 온 마음이 흠뻑 젖도록 종일 울 것이고, 그로써 그에 대한 마지막 제례가 끝날 것이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 날들이 시작될 것이고, 빨래를 널다가 허리께를 두드리며 몸 안에서 들려오는 텅빈 소리를 듣게 된다. 설거지나 마른 빨래를 정리하는 일따위로 생색을 내는 남자를 목도하게 될 것이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이 일을 내가 반드시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은 오답이 되고마는 것일까 고민하게 된다. 그와 나는 함께 살지만 함께 고민하는 일들은 줄어들 것이고, 결국 우리는 각자의 앞으로 난 좁은 길을 걷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아이가 자라 이사를 갈 때 즈음에서야 나는 먼지 쌓인 상자 속에 담긴 배드민턴채를 발견하게 된다. 그날은 아마도 나의 생일일 테고, 남자는 처음으로 정확한 날짜에 내 생일선물을 사온다. 남자를 끌어 안고 입을 맞출 것이고, 아이는 외가에 맡겨 둔 상태여서 우리는 곧 아주 오랜만에 사랑을 나누게 된다. 샤워를 마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온 나는 남자의 품에 안겨 오래 전의 꿈에 대해 얘기한다. 카페에 자주 찾아왔던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에 대해. 그 남자와 한강에서 배드민턴을 쳤던 이야기를. 그러다가 문득 묘한 점을 깨닫게 된다. 어째서 모자를 내려놓는 남자와 시작한 배드민턴이 생일 선물을 잘못 사온 남자와의 엔딩으로 끝마치게 되었는가를. 여자는 남자의 품 속에서 빠져나와 오래 그의 얼굴을 바라볼 것이고, 아주 잠깐, 조그만 새가 포르륵 날아오를 정도의 순간, 격한 놀라움이 여자의 얼굴을 스칠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남자의 품으로 다시 파고들 것이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감싸 안고 한없이 다정한 말들을 속삭여 줄 것이다. 그들의 인생에서 그 하루를 빼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겠지만 그들은 한 번 더 힘을 내서 비슷한 인생을 리플레이해 갈 것이다. 어느 순간 여자로부터 떨어져 나온 나는 고층의 아파트를 빠져나와 비슷하게 보이는 골목들을 지나 횡단보도로 나설 것이고,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어 나는 횡단보도를 건넌다. 건너편에 기다리는 것이 어떤 삶인지 가늠도 하지 못한 채. 그것이 미래인지, 과거인지, 아니면 현재인지 그 시간조차 헤아릴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신뢰하고 있다. 지금의 남자친구가 언제까지 나의 남자친구일지 알 수 없다고 알고 있다. 오리배가 선착장에 가 멈추고 오리배를 젓던 사람이 오리배에서 내린다. 그와 동시에 밤이 모습을 드러낸다. 


“벌써, 밤이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잔디밭 위에 누워있던 남자친구는 곁에 내려둔 모자를 주워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014. 9. 2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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